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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코리아/인요한]나는 아랫목서 삶을 배웠다

입력 | 2011-01-21 03:00:00


인요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1959년 전주에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순천에서 보냈다. 나의 4대조 할아버지 유진 벨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교 후손으로 호남지역에 파송돼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할머니 샬럿 벨은 1899년 목포, 아버지 휴 린튼은 1926년 군산에서 태어났으니 나는 자녀를 포함해 5대째 한국에서 가문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동네에서 ‘짠이’(영어 이름 Johnny의 전라도식 발음)라 불렸던 나는 어릴 적부터 유별나 집보다 친구 집에 머무를 때가 많았다. 동네 어른들이 “아따, 이놈 미국 넘 같은디 이쁘구만” 하면 “이놈이 머여, 내 이름은 짠이여”라고 맞받곤 했다.

아버지는 섬으로 선교를 다니느라 한번 집을 나서면 많은 경우 최소 2, 3주 집을 비웠다. 어머니는 결핵 퇴치 사업에 바빠 5남 1녀를 챙기기 힘들었다. 나는 자연히 린튼가보다는 순천시 매곡동 동네 어른들 손에 컸다. 친구 집에서 놀다가 그 집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으레 “아버지 오셨다∼”는 소리가 식구들의 입을 타고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 나도 함께 숨을 죽이고 벌떡 일어나 친구 아버지께 넙죽 인사하며 귀가를 반겼다. 아버지는 집안의 중심이자 어려운 존재란 걸 그렇게 알았다.

형들에게 맞고 울면서 동네 할머니에게 하소연하러 가면 할머니는 한복 고름으로 내 눈물과 콧물을 닦아 주시면서도 “그래도 형은 형이다. 형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존중하는 예의를 배웠다.

날이 저물면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골방 아랫목에 모였다. TV도 인터넷도 전기도 없던 그 시절 동네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는 경험 많은 노인들의 스토리텔링이었다. 대나무 밭에서 호랑이를 봤다는 무용담, 전쟁통에는 돼지도 울음을 멈추고 고요하더라는 기억, 집 앞에 시신이 널려 있었던 이야기….

이야기엔 삶의 지혜가 넘쳤다. “바람이 저쪽으로 불면 비가 오고, 이쪽으로 불면 비가 그친다” “씨는 언제 뿌려 언제 거둬야 한다”는 자연의 섭리, “남한테 피해 주지 말아야 하고 남이 도움을 청하면 기쁘게 도와라”라는 공동생활의 원칙….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도 학교도 아닌 아랫목에서 배웠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질서와 정, 순정과 의리 같은 사람살이의 가치를 배웠다. 미국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을 포함해 수많은 고위 인사를 만나도 품위와 자신감을 잃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능력,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한 핵심 경쟁력인 둥글둥글한 성격은 ‘아랫목 교육’의 힘이다.

한국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전쟁으로 인한 폐허 속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까지 유치하며 경제대국을 일군 기적의 나라다. 나는 한국인의 저력의 바탕은 ‘공동체 문화’에 있다고 본다. 피를 나눈 사람만이 가족이 아니라 온 동네가 확장된 가족 공동체로서 공생하며 시너지를 냈다. 아랫목에서 공동체는 함께 어울리고 상대를 존중하며, 사람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갖는 인재를 길렀다.

소가족 중심으로 공동체가 분화되고, 아파트 그리고 각자의 방으로 공간마저 나뉘고, 중앙난방으로 아랫목이 사라지면서 한국인은 이런 교육의 공간을 잃었다. 집에 오면 가족 대신 강아지가 반겨준다는 중년의 아버지, 돈 등의 이유로 가족을 해치는 패륜 범죄,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는 각박한 민심의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한국인들이 잃은 것은 아랫목만은 아닌 듯하다.

인요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