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논설위원
후는 마침내 중국이 미국과 대등한 동방대국에 등극했음을 과시해 미국의 혼을 빼놨다. 추아는 ‘왜 중국 어머니들은 우월한가’라는 도발적 제목으로 자신의 자녀교육법을 월스트리트저널에 실어 미국인의 비위를 긁었다.
안 그래도 미국은 자국의 쇠락과 중국의 굴기(굴起)에 뼈가 저리는 처지다. 일본계 3세 미국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21세기 첫 글로벌 위기에서 미국 민주주의는 무능과 부패를 노출했지만 중국은 독재자본주의(authoritarian capitalism)의 우월성을 입증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다 ‘고발’했다. 그의 말이 맞는다면 앞으로의 세계는 암울하다. 우리처럼 작은 나라는 조공이라도 바쳐야 하는 게 아닌지 걱정될 판이다.
한국 부모 敎育熱 짓밟는 정부
교육열로 치면 추아 정도의 엄마는 얘깃거리도 안 되는 곳이 우리나라다. 예일대 교수쯤 되는 한국 엄마가 영어로 책을 안 내서 그렇지, 우리 엄마들이 자녀교육에 쏟는 열정과 희생은 중국에 지지 않는다.
이 엄청난 교육에너지가 세계 모든 엄마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중요하다. 자녀사랑이야 공통된 본능이겠지만 교육열은 그렇지 않다. 브라질에선 저소득층 엄마들한테 아이들 학교 보낸다는 조건으로 정부가 현금 지원을 하는데도 학교 안 보내고 돈 벌어오라고 등 떠미는 집이 수두룩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육열을 ‘망국적 치맛바람’으로 폄훼해온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미국에선 미중 경쟁이 군사력 아닌 교실에서 결판난다며 교육경쟁력 높이기에 박차를 가하는 판국이다. 우리나라가 중국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가 바로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열로 글로벌 인재를 키우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런 한민족이 두려웠던 일본은 우리의 학구열과 교육열 낮추기를 식민통치의 주요 시책으로 삼았다. 이 식민통치의 유산을 지금 이명박 정부가 이어가고 있다.
출범 때만 해도 ‘글로벌 인재양성’이 핵심이었던 교육정책은 2008년 촛불시위에 놀라 ‘사교육 때려잡기’로 돌변했다. 사교육비에 허리 휘는 서민을 위해서라지만 가계소비지출에서 의식주를 뺀 교육비 지출 비중은 1965년 24.5%에서 2008년 22.2%로 외려 줄었다. 가장 많이 늘어난 건 교통통신비인데도 정부는 교육열이 나라를 망치기나 하는 양 엉뚱한 정책에 매달리고 있다.
더구나 글로벌 위기 이후 선진국의 실력주의(meritocracy)는 더 확대되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불평등’을 특집으로 다룬 최근호에서 “정부는 교육투자에 힘쓰되, 잘하는 애들을 막지 말고 못하는 애들을 끌어올려 계층이동을 북돋는 게 최선의 정책”이라고 했다. ‘공부 잘 가르치기를 회피하는 교원노조가 빈곤층의 적(敵)’이라는 대목은 한국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자유 없는 중국보다 옥죄어서야
우리 국민이 10년 후에 먹고살 것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대통령이라면 국제고 외국어고 같은 인재학교와 명문대학의 엘리트 교육을 옥죄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부인하고 싶대도 장차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글로벌 인재는 여기서 나온다. 땅덩어리도, 자원도, 이성(理性)도 빈약한 우리나라가 중국에 조공 바치지 않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정부가 막진 말기 바란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