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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허두영]‘군화와 곰신’을 위한 연구개발

입력 | 2011-01-24 03:00:00


허두영 과학동아 편집인

그렇다. 대한민국을 지키는 건 ‘군화와 곰신(고무신)’이었다. ‘보온병’과 ‘폭탄주’를 들고 저들끼리 악다구니하며 국가를 지킨다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군화와 곰신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젊음을 바치는 이 땅의 갑돌이와 갑순이다. ‘나라는 군화가 지키고, 군화는 곰신이 지킨다’는 것이 그들의 긍지다.

“군화를 신고 1마일 이상 걸어보지 못한 사람은 훌륭한 군인의 모습을 표현할 수 없다.” 베트남전에서 총상까지 입었던 미국 해병대 출신 데일 다이 대령은 영화 ‘플래툰’에서 군사기술 자문역을 맡으면서 출연하는 주연들을 ‘제대로’ 훈련시켰다. 군화부터 신긴 것이다.

신병으로 입대한 갑돌이가 처음 당황하는 것은 ‘군화에 발을 맞추는 법’이다. 크든 작든 헌것처럼 보이는 새 군화에 발을 맞춰 천리행군을 하면서 조국을 위해 물집과 상처와 무좀과 싸우는 법을 배웠다. 다음으로 배우는 것은 ‘군화에 광내는 법’이다. ‘말표 구두약’에 침을 발라가며 다른 어떤 구두보다 번쩍거리게 만드는 법을 익히며 대한민국 군인의 자존심을 지켰다.

그런데 군화에 문제가 생겼다. 국방부가 지난해 새로 보급한 군화 가운데 굽이 벌어지고 물까지 새는 불량품이 여럿 발견됐다. 북한이 연평도에 포탄을 쏟아 붓는데 K1 전차는 포신이 터져버리고 K9 자주포 엔진엔 구멍이 뚫렸으며 K21 장갑차는 설계가 잘못돼 물에 가라앉아 버렸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국방기술 수준은 선진국 대비 78% 수준이다. 분야별로 보면 항공(70%), 화생방(73%), 감시정찰(75%), 지휘통신(77%)이 뒤떨어진다. 그 원인은 어처구니없게도 정보기술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보기술은 미래 무기체계의 기반으로, 한국의 민간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자부하는데 말이다.

무기체계는 10∼20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 수천억∼수조 원을 투입하는 초대형 과제다. 정보기술은 하루가 멀다 하고 빠르게 발전하는 첨단기술이다. 초대형 장기과제가 재빠른 정보기술을 활용하지 못하니 뒤늦게 ‘설계 결함’이라는 생뚱맞은 진단을 듣고 깜짝 놀라게 된다. “뭐어∼, 설계 결하암∼.”

미국의 발명가 휫컴 저드슨은 군화를 즐겨 신었다. 불룩한 아랫배 때문에 끈을 매기 불편했던 그는 신고 벗기 편한, 끈이 없는 군화를 개발하려다 1893년 지퍼를 발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 공군이 구명조끼나 비행복을 빠르게 입고 벗기 위해 지퍼를 채택하면서 지퍼가 널리 보급됐다. 어떻게 보면 군화 하나라도 빠르게 신고 벗기 위한 집요한 연구개발(R&D)이, 민간기술이라도 필요하면 바로 채택하는 조달정책이 세계 최고의 국방기술을 만드는 것이다.

사회지도층이나 그 아들이 군화를 신지 않으려 한다면 물이 새고 굽이 갈라지는 불량 군화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군화에 문제가 생기면 ‘곰신’이 슬퍼하고, ‘곰신’은 아들에게 군화를 신기지 않으려 들 것이다.

첨단 무기체계 획득도 중요하지만 ‘군화와 곰신’의 애국심을 ‘획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군화와 곰신을 위한 R&D, 곧 세계 최고의 군화를 만드는 것이 최고의 국방기술 전략이다. 네루는 ‘정치란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국방이란 군화 속 물집과 상처와 무좀을 해결해 주는 것이다. 어디 국방 R&D뿐이랴. 국가의 모든 R&D는 국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것인데….

허두영 과학동아 편집인 huhh2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