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동빈 산업부 차장
봉투 겉면에는 정성들여 손으로 쓴 한글 주소와 이름이 있었지만 내용물은 그림이 그려진 의례적인 연하장에 간단한 사인 정도가 있으려니 예상하면서 속을 열어봤다. 그런데 하얀 편지지가 쑤욱 얼굴을 내밀었다. 편리한 e메일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넘쳐나면서 연애편지마저 거의 사라진 시대에 일종의 비즈니스 관계로 만난 이국의 친구에게 손으로 꼭꼭 눌러쓴 편지라니.
‘초겨울 추위가 매서워지고 있습니다만, 평안히 지내고 계신지요’라고 시작한 편지에는 최근 그의 일상이 적혀 있었다. 지기라 씨가 두 아들과 등산을 하며 찍은 사진도 한 장 들어 있었다. 곧 도쿄에 있는 도요타 부설 국제경제연구소에서 근무할 예정인데 일본에 오면 꼭 연락해 달라는 진심어린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편지를 쓴 날은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이었다.
그가 한국에 있던 4년간 10번 정도는 만났던 것 같다. 2006년 첫 기자회견에서 그는 일본어를 썼지만 다시 만날 때마다 조금씩 말이 늘더니 한국을 떠나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서울 중구 무교동 한 음식점에서 만났을 때는 한국어로 대화를 해도 거의 불편이 없을 정도로 실력이 늘어 있었다. 한국에 있는 동안 매일 한두 시간씩 우리말을 공부한 결과다.
현재 한국토요타 사장인 나카바야시 히사오(中林尙夫) 씨도 부임 1년 만에 우리말을 약간 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봐서 현지어를 배우는 것이 도요타의 정책일 수는 있지만 떠난 지 거의 1년 만에, 앞으로 한 번도 못 볼지 모르는 한국 기자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도록 한 것은 회사의 정책이 아닐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간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회사에 진심으로 충성하는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했다고 본다.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 한국토요타가 판매하는 렉서스는 최고의 판매실적을 올렸으며, 도요타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발표했다. 국내 수입차업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회공헌을 하는 데도 그가 주도적인 역할도 했다. 이런 실적도 편지를 쓰는 그의 정성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뭐, 편지 한 통에 이렇게 호들갑스럽게 떠드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기자와 명함을 교환하고 숱한 대화를 나눴던 200명이 넘는 한국 기업의 임원들로부터는 이런 편지를 단 한 장도 받아보지 못했다. 물론 기자도 편지를 쓴 적이 없으니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석동빈 산업부 차장 mobid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