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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강국이 앓고 있다]복지개혁 뒤늦게 칼 빼든 노르웨이

입력 | 2011-01-31 03:00:00

‘오일머니 포퓰리즘’ 흔들리자 강성노조도 “연금개혁 시급”




《27일 오후 4시경(현지 시간) 노르웨이 오슬로 중심가 노동복지청 옆 지하철역 출구. 10여 명의 건장한 청년이 이동식 단말기를 들고 지하철 승객들의 표를 검사했다. 지하철에서 내린 승객들은 이들을 보자 표정이 굳어졌다.

노인과 어린이 할인표까지 확인하던 청년들은 “다른 승객들에겐 미안하지만 무임승차를 하나라도 잡아내는 것이 우리 임무”라고 말했다. 자원부국으로 국민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8만 달러(구매력 기준 5만3000달러)에 이르는 노르웨이 정부가 무임승차 단속에 힘을 쏟자 시민들은 “관대했던 옛날 제도가 그립다”며 한마디씩 했다.

지하철 표뿐 아니라 노령연금의 무임승차도 점차 사라질 판이다. 노르웨이는 올해 1월부터 67세 이상이면 누구나 받던 기초 노령연금 비중을 대폭 줄이고 소득 수준에 따라 연금액을 정하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1월부터 새 연금법 시행

지난해 말 22년간 다니던 가구 회사에서 퇴직한 한스 올라브 씨(62)는 최근 노르웨이 노동복지청이 보낸 연금통지서를 받아 보고 한동안 계산기를 두드렸다. 제도가 바뀌어 올해부터 곧바로 연금을 탈 수 있지만 예상 금액이 1년 전에 비해 10% 줄었다. 평균 월급이 3만4554크로네(약 664만 원)이던 그는 제도가 바뀌지 않았다면 매월 월급의 65%를 평생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의 예상 연금은 월급의 55%였다. 통지서에는 ‘당신이 67세부터 노령연금을 받으면 월급의 73%로 늘어난다’고 적혀 있었다.

노령연금의 축소를 골자로 하는 노르웨이의 연금개혁은 이웃나라 스웨덴의 제도를 본떠 온 것이다. 노령연금의 기둥 역할을 하던 기본연금을 스웨덴과 같은 방식으로 크게 줄였다. 보험료 납부와 관계없이 지급되던 기본연금의 수혜자는 지난해 65만 명을 웃돌았으나 앞으로 6만 명까지 축소된다. 기본연금의 비중이 줄면서 올라브 씨처럼 연금 보험료를 꾸준히 낸 가입자의 노령연금도 줄었다.

48세 이하 젊은 세대의 연금은 완전히 새로운 제도에 따라 계산된다. 소득이 올라브 씨와 비슷한 젊은 세대가 62세에 노령연금을 받을 경우 연금총액이 월급의 56%로 내려간다.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거리에서 만난 브로메 아냐 씨(33)는 “베이비붐 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적 연금이 줄었지만 지금은 무임승차자를 없애면서 낸 만큼 받는 체제로 바뀌었기 때문에 젊은 세대도 이 제도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고 전했다.

○“연금은 국가안보의 문제”

노르웨이는 연간 GDP보다 많은 오일머니를 정부연금기금(일명 석유비축기금)으로 쌓아두고 있다. 2030년 이후 연금재원과 유가 등락에 대비해 수십 년간 마련한 이 기금의 시장가치는 지난해 52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노동복지청 공무원들은 “연금 기금이 이미 조성됐기 때문에 공적연금 보험료를 따로 펀드로 운영하지 않는다”면서 “비상시를 제외하고는 기금이 연금에 개입한 일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노르웨이 정부는 매년 기금의 4% 범위에서 정부 예산을 지원하는 가이드라인을 두고 있다.

하지만 노르웨이 정부는 2008년부터 이 가이드라인을 지킬 수 없어 기금에 손을 벌렸다. 노동복지청의 존 크누드센 국제담당 국장은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어기며 기금을 끌어다 쓴 가장 큰 이유가 노령연금의 5년 연속 적자”라고 말했다. 지난해 노르웨이 공공연금은 수입 414억 달러, 지출 583억 달러로, 169억 달러의 적자가 났다. 2006년부터 비슷한 규모의 적자가 이어졌다.

공공연금 적자는 정부 예산으로 메워졌으며 정부 예산 부족분은 석유비축기금으로 채워졌다. 결국 공공연금적자→정부 예산 지원→석유비축기금 동원이라는 연쇄반응이 일어났던 셈이다. 이렇게 해서 지난해에만 석유비축기금의 6% 이상을 끌어다 썼다.

크누드센 국장은 “석유비축기금의 사용은 국가안보와 직결된 매우 심각한 문제인데 공공연금 적자가 석유비축기금의 사용을 촉발했다”고 잘라 말했다.

복지 전문가들 사이에서 노르웨이는 연금개혁 과정에서 스웨덴처럼 연금수령자 단체 등 이해당사자를 배제하지 못해 연금 개혁을 지체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공무원들은 “연금 적자 이후 석유비축기금까지 동원되자 연금개혁에 반대하던 강성 노조도 개혁이 시급하다는 입장을 나타냈다”고 입을 모았다.

○양로원 점심 쿠폰도 유상으로

28일 낮 12시경 오슬로 북쪽의 한 양로원 입구에 80세 이상 노인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노인들은 지갑에서 48크로네(약 9200원)씩을 꺼내 점심 쿠폰을 샀다. 이 양로원은 2년 전에는 모든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했지만 지금은 유료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한편 민간 자금을 모으는 데 주력하고 있다.

양로원 관리자인 프라이덴룬덴 씨는 “지금 양로원에 다니는 노인의 평균 연령이 85세”라며 “노인들이 급격하게 늘어나 서비스를 유상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날에는 최고령자인 오드 소호페 씨도 점심 식사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그는 “영어 강좌를 들을 때마다 40크로네씩 내고 있다”며 “내 나이가 겨우 96세”라고 농담을 던졌다.

월급을 오슬로 시청에서 지원받는 이 양로원 직원들은 지난해부터 주민과 자원봉사자들의 돈도 거뒀다. 프라이덴룬덴 씨는 “양로원 임차비를 내기 위해 지난해 지로용지를 통해 주민들의 돈을 모았는데 20만 크로네(3840만 원)가 입금됐다”며 “민간에서 모은 돈이 남으면 집 없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석유비축기금은 2009년부터 노인복지 분야에도 투입되고 있으며 연금개혁과도 맞물려 돌아간다. 양로원 주방에서 일하는 벤테 씨(75)는 “오일머니로 노인 일자리가 생기고 있는데 나와 같은 연금수급자가 파트타임으로 일해도 연금이 깎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오슬로=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
 

▼총선공약에 “공짜 해외휴가”도▼


유료 서비스 제도로 전환하고 있는 노르웨이의 양로원. 28일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시내의 양로원 식당에서 한 노인(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민간으로부터 성금을 모으기 위한 지로용지를 펴 보이고 있다. 이 양로원은 2009년부터 노인들에게 돈을 받고 점심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오슬로=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

‘67세가 넘는 어르신은 모두 지중해로 공짜 휴가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국민의식이 높은 선진국 총선에서 이런 공약을 내거는 정당은 포퓰리즘이라는 거센 역풍에 선거를 망칠지 모른다. 하지만 노르웨이에서는 이런 공약이 나온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국민소득이나 교육 수준, 평균수명, 유아 사망률을 종합 평가해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DI)에서 노르웨이는 해마다 1위에 오른다. 지중해 무상여행이 실현 불가능한 공약이 아닌 이유는 수천억 달러가 넘는 석유비축기금 덕이다.

이 나라는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가난한 농업 국가였지만 1970년대 북해 유전 개발로 돈방석에 앉았다. 2006년 기준으로 노르웨이는 하루 석유생산량이 쿠웨이트보다 많다. 세계 10대 산유국(2006년 기준). 수출량만으로는 세계 3위 수준이다. 1인당 국민소득도 1991년을 기점으로 스웨덴을 앞질렀다.

제조업 수출 비중이 높은 스웨덴에서는 1990년대 초에 경제위기를 겪으며 복지제도를 정비해 국가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노르웨이는 북해 유전 개발 이후로 경제위기를 겪은 적이 거의 없다.

KOTRA의 2005년 보고서에 따르면 노르웨이가 석유로 벌어들인 돈은 3484억 크로네(약 66조9730억 원)로 정부 총수입의 38%를 차지한다. 상품 판매 및 서비스 부가가치세(1578억 크로네)에 소득·재산세(1229억 크로네) 담배 및 주세(169억 크로네)를 합한 수치보다 더 많다. 노르웨이는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 등 다른 북유럽 국가와 다르며, 한국의 모델로 삼기 어렵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석유 자원이라는 든든한 배경 덕택에 다른 국가보다 고민이 덜하지만 너무 높은 세금이나 복지지출을 둘러싼 논쟁은 노르웨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5월 스웨덴라디오(SR)가 스웨덴 소매업연구소를 인용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조사 전 3개월 동안 노르웨이 동남부 지역 주민 절반 이상이 물건을 사러 스웨덴에 다녀왔다. 스웨덴 물가가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지만 간접세가 워낙 높은 노르웨이에 비하면 ‘쇼핑 천국’이라는 얘기다.

노르웨이의 2005년, 2009년 총선에서는 유가 급등으로 생긴 이익을 어떻게 분배할지가 쟁점이 됐다. 우파는 감세정책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어가자고 한 반면 좌파는 복지지출을 늘리자고 주장했다. 두 번 모두 좌파가 승리했다. 이를 두고 노르웨이 언론은 ‘석유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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