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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이지평]정쟁에 곳간 썩는 줄 몰랐던 일본

입력 | 2011-01-31 03:00:00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미국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일본 장기국채의 신용등급을 ‘AA’에서 ‘AA―’로 한 계단 낮췄다. 일본 장기국채의 신용등급은 21단계인 신용등급 중 위에서 4번째로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대만 등과 같아졌다. 리먼브러더스 쇼크의 후유증으로 고전하는 미국과 독일 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이 최고 등급인 ‘AAA’인 것을 고려하면 세계 최대의 순채권국으로서 유럽의 재정 및 금융위기를 지원하고 있는 일본의 신용등급이 이렇게 낮은 것은 의아한 일이다.

정치권 공방에 재정개혁 뒷전

사실 일본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1.2% 정도로 독일의 3.1%, 미국의 3.3%에 비해 낮으며, 이번 신용등급 강등 조치로 일본 국채에 대한 투매가 당장 발생해 국채 금리가 급등하거나 엔화 가치가 급락할 가능성은 낮다. 일본의 재정 불안은 그리스 등의 재정위기와 다른 측면이 있다. 일본은 채권대국으로서 막대한 민간 저축이 있고 정부가 적자를 내고 국채를 발행해도 90% 이상이 일본 내에서 소화되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그동안 늘어나는 부채를 적극적으로 줄이지 않았다. 일본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합한 총채무가 경상 국내총생산(GDP)의 200%를 초과하여 그리스 등 남부 유럽 각국보다 부채 부담이 많아진 것은 이러한 일본의 여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 이런 여유를 영원히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인구 고령화와 함께 사회보장지출이 급증하고 개인 저축률도 급락하고 있어 해마다 조세 수입보다 많은 국채를 발행하고 있는 일본의 적자 재정은 어느 시점에서 위기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일본 국채가 일본 내에서 잘 소화되지 않고 상당 부분을 해외에서 판매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일본의 재정 파탄 가능성이 현실 문제로 부각될 것이다. 이 경우 일본의 채권, 엔화, 주식의 3중 하락이 극심해지면서 아시아 및 세계 경제에 충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일본으로서는 여유가 있는 지금 근본적인 재정개혁에 나설 필요가 있으나 신용평가기관은 일본 정부의 개혁정책 수행 능력이 결여돼 있다고 보고 있다. 소비세 인상 등의 재정개혁을 들고 나온 여당인 민주당은 작년 여름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했고, 야당인 자민당의 정치 공세도 심해져 일본 정부로서는 위기의식이 미약한 일본 국민에게 인기 없는 재정개혁을 강요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일본 장기국채의 신용등급 강등으로 국제 투자 자본은 앞으로 재정문제에 더욱 민감해질 것이다. 우리나라로서는 일본이 겪고 있는 저출산 및 고령화로 인한 재정적자 확대 압력이나 당파적 갈등으로 인한 정책 왜곡 현상 등 재정 파탄의 위험도를 높이는 요인을 경계해야 한다. 일본을 능가하는 속도로 진행될 우리나라의 저출산 및 고령화에 따라 발생하게 될 재정악화 압력을 근본적으로 억제할 필요가 있다.

고령화 복지지출 등 제도정비 필요

지속 가능한 인구 구조를 유도하는 한편 과거 인구 확대기에 유효했던 정책이 고령화시대에는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정책과 조직을 관행 때문에 유지하려는 자세보다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해 폐기할 것은 과감하게 폐기하면서 재구축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일본이 고령화에 따라 늘어나는 복지 지출의 재원 확보에 실패한 것은 재정지출 구조의 재조정, 신규 복지목적세 도입 등이 기득권의 조정을 어렵게 하는 당파적 갈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인이 인기영합 정치만 추구하고 당파적 갈등으로 정책 리더십이 상실돼 국가 재정 파탄까지 우려되는 상황에 빠진 일본의 사례를 본다면 중장기적 비전을 가지고 초당적으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질 높은 정치가 중요하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