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세계-지적 호기심에 아프리카-중동 1지망했죠”
《올 들어 외교부에 전에 없던 변화가 생겼다. 외무고시 여풍(女風)도 벌써 몇 년 된 이야기지만 아프리카·중동국을 ‘1지망 부서’로 적어낸 새내기 여성외교관들이 등장한 것이다. 꼭 자원외교 바람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세계와 외교를 바라보는 젊은 세대의 감수성이 달라진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27일 서울 세종로 외교통상부 접견실에 선 전유진 (왼쪽) 김하영 서기관. 전 서기관이 “나중 일이지만 기회가 닿으면 중동에서 첫 해외근무를 하고 싶다”고 하자 김 서기관은 “그래도 중동은 아프리카보다 살기 낫다”며 웃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지금 남편(김원수 유엔사무총장 특보)이 있는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대에서 연수 중인 박 전 참사관은 28일 수화기 너머로 “유럽 여행을 하면서 대한민국을 다시 느꼈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점괘도 그랬고…”라며 웃었다.
1978년 외무고시에 합격한 김 전 대사만 해도 “시험장에 여자화장실이 없어 용변을 참느라 시험을 망쳤다는 생각까지 했다. 외교부 생활도 마치 마이너리티나 장애인처럼 고립됐다”고 할 정도였다. 박 전 참사관도 그나마 동료 외교관인 남편이 뉴욕의 유엔본부에, 자신이 뉴욕총영사관에 근무하면 ‘대박’이었고, 시아버지까지 모시고 아이 둘과 혼자 동남아 공관 근무를 한 적도 있다.
여성외교관들의 미혼율이 보통 여성의 3배나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지난해 국회에서 이 문제를 제기한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김충환 의원(한나라당)은 “일반 여성의 경우 미혼율이 30대 후반 7.6%에서 40대 후반 2.4%로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는 데 반해 여성외교관들은 30대 후반과 40대 이상 미혼율이 각각 23%, 22%로 큰 변화가 없다”며 구체적인 통계자료까지 인용했다.
‘김효은 키즈(kids)’까지 낳았다. 작년에 첫 배치를 받은 외시 43회 새내기들 중엔 김 과장의 책을 보고 의전실을 희망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전에 없던 현상이다.
이달 초 ‘2등 서기관’의 계급장을 달고 첫 배치를 받은 외시 44회 새내기들 사이에선 중동, 아프리카과를 노리고 경쟁을 벌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의전실과 마찬가지로 전에 없던 일이다. 전통적으로 인기가 높은 부서는 역시 북미국과 동북아시아국. 하지만 신입 외교관 35명을 대상으로 4지망까지 받아본 결과 아프리카과에 7명, 중동과에 4명이 지원했다. 그중 아프리카과는 2명이 1지망, 중동과는 3명이 1지망이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사람은 아프리카과에 김하영 서기관(31·연세대 중어중문학과 졸업), 중동과에 전유진 서기관(29·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둘 다 여성이다. 최근의 정정(政情)을 굳이 옮길 필요도 없이 중동, 아프리카는 험지(險地)다. 험지일 뿐 아니라 빛도 안 나고 이른바 출세코스와도 거리가 멀다. 그래서 선배들 중엔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하면서도 그 사실이 알려질까 전전긍긍하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옛 프랑스령 식민지가 많은 아프리카로 배치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냉탕 온탕 순환근무 원칙은 그래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첫 희망부서 1지망을 중동, 아프리카로 적어낸 새내기 여성외교관들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 현지로 배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선배들조차 자신들과 다른 그들의 감수성을 궁금해 했다.
부서 배치 4주차에 접어들던 27일, 서울 세종로 외교통상부 청사 304호 접견실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전유진=(웃으며) 굉장히 싫어했다. 예전부터 중동 얘기를 많이 해서 충격은 덜하셨지만 내가 ‘확인사살’을 하니까…. 아직도 중동이나 아프리카에 대해선 부정적인 인식이 많아 딸의 안전을 걱정하셨을 거다.
∇김하영=(역시 웃으며) 다 북미를 원하실 것이다…. 나는 부모님이 갸우뚱하시기 전에 아프리카의 좋은 점에 대해서 마구 얘기했다. 선수를 친 거다.
―아프리카의 좋은 점? 안 그래도 이 인터뷰의 취지가 ‘새내기 외교관, 그것도 여성외교관이 왜 중동, 아프리카인가?’이다.
▽김=우선 상투적인 말 같지만 아프리카를 미지의 세계라고 하는데 (대한민국이) 그 큰 땅을 미지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에겐 일종의 ‘대의’다. 또 중국이나 미국처럼 큰 부서에 비해 우리 같은 신입들이 업무에 기여할 수 있는 통로가 넓다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이 큰 이유다. 그리고 과장의 인품도 봤다(웃음).
―대한민국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도 주재했지만 그렇다고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말한 ‘거대한 체스판’의 글로벌 플레이어라고 하기는 어렵다.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 대한민국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까.
▽전=나는 좀 다른 접근을 했다. 대한민국의 역할보다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우리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사회의 다양성이라고 할까. 프랑스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 아랍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정말 달랐다. 우리나라는 다소 폐쇄적인 측면이 없지 않은데 우리와 다른 사회를 보면서 우리의 가치관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고의 폭도 넓힐 수 있다.
―냉탕 온탕 얘기는 물론 들어봤을 것 같은데…. 아프리카 근무 중 5세짜리 아이가 말라리아에 걸려 2주일이나 40도가 넘는 고열에 숨이 넘어가는 상황인데도 병원이 없어 기도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도 있다.
▽김=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소리가 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감수할 수 있다. 또 여성외교관들도 점점 많아질 것이고….(인프라가 나아질 것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전=어디나 장단점이 있다. 미국 유럽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외교관이기 때문에 민간인들이 할 수 없는 경험을 해볼 수 있는 일종의 ‘특권’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 냉탕 온탕 순환근무 원칙은 계속될 것이라고 들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중동 아프리카 지역 개발협력, 에너지 외교가 각광을 받고 있는데 혹시 그런 시류엔 영향을 받지 않았나.
▽김=물론 얘기가 많이 되니까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것만이라면 개발협력국도 있고, 에너지나 기후협력 전문부서들도 있다. 그 부서들을 ‘뒤로하고’ 온 것은 지적 호기심과 신입들이 기여할 수 있는 여지 때문이다.(김 서기관은 ‘뒤로하고’라는 말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으나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김효은 과장은 책에서 “앞으로 10년, 15년 뒤면 수십 명의 여성외교관들이 대사직에 진출할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을 인터뷰한 뒤 그 말이 실감났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女風, 법조계보다 강해… 합격자 비율 갈수록 상승▼
■ 외무고시 휩쓰는 ‘우먼파워’
그러나 특히 2000년대 들어 외무고시 여성합격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어 여성대사 시대는 말 그대로 시간문제다. 최근 10년간 전체 합격자의 절반을 넘긴 해가 2005, 2007, 2008, 2010년 네 해나 됐다. 비율은 갈수록 상승 추세다.
1년에 30∼40명을 뽑는 외무고시와 1000명 안팎을 선발하는 사법시험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사시의 여풍(女風)에 비해서도 여성외교관의 합격 비율은 높다. 사법시험의 경우 여성합격자가 2005년부터 30%대를 기록하다 지난해 41%로 치솟았다. 그래도 외무고시 여성합격자 비율에는 못 미친다.
법조인 양성도 로스쿨 체제로 바뀌었지만 외무고시도 지금 방침대로라면 2013년 폐지된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 특채 파문으로 잠시 주춤하긴 했다. 그러나 정부는 일단 내년에 외교아카데미(가칭)를 개교해 일종의 ‘입학사정관제 방식’으로 직업외교관을 선발할 계획이다. 필기 위주에서 심층면접 등으로 입학생을 선발한 뒤 1년 동안 집중적으로 실무교육을 한 다음 필요인력을 걸러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림동 고시촌 외교관’도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