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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정연욱]‘영수회담’이라는 낡은 문패

입력 | 2011-02-08 03:00:00


과거 영수(領袖)회담은 대개 뒤끝이 좋지 않았다. 2005년 9월 노무현 대통령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만나 대연정(大聯政)을 논의했지만 의견 차이만 확인했고, 회담 이후 노 대통령은 대연정 제안을 사실상 접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김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일곱 차례 영수회담을 가졌지만 불신의 골만 깊어졌다. 한나라당 주변에선 ‘7번 만났으나 7번 뒤통수를 맞았다’는 뜻으로 ‘칠회칠배(七會七背)’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영수’는 옷깃과 소매란 뜻이다. 옷차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이 그 부분이어서 조직의 우두머리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조선 후기 유학자 송시열은 효종과 당시엔 드물었던 독대(獨對)를 해 서인 노론의 ‘영수’임을 과시했다. 근래에 영수회담은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만나 ‘담판’을 벌이는 자리가 됐다. 하지만 대통령과 야당 대표의 만남을 ‘영수회담’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에 냉소적이거나 거부감을 느끼는 국민도 적지 않아 보인다. 그동안의 이른바 ‘영수회담’이 국민을 위한 ‘큰 정치’는커녕 이름값도 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영수는 무슨 얼어 죽을 영수’라고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중간선거 패배 이후 미치 매코널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를 백악관에 초청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중간선거에서 드러난 민심을 반영해 야당인 공화당과 협력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원 다수파가 된 공화당의 에릭 캔터 하원 원내대표도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만났다. 미국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들과 만나는 일은 일상적인 정치 행위다. 우리처럼 영수회담이라는 거창한 문패도 없다.

▷이명박 대통령과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영수회담을 앞두고 있다. 양측이 실무 준비에 들어가면서 청와대와 민주당의 ‘기(氣) 싸움’이 뜨거워지고 있다. 민주당 내부도 시끄럽다. 겉으로는 손 대표와 박지원 원내대표가 회담의 전제조건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양상이지만 속내는 당 운영의 주도권 다툼이라는 분석이다.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영수회담이라는 낡고 거추장스러운 문패를 떼어내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만날 수 있어야 그게 진정한 소통의 정치일 터이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