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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성동규]누구에게나 ‘잊혀질 권리’ 있다

입력 | 2011-02-10 03:00:00


성동규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장

“…가슴을 데인 것처럼 눈물에 베인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괴롭다. 내가 사는 것인지 세상이 나를 버린 건지 하루가 일년처럼 길구나….” 이는 지난해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TV드라마 ‘추노’의 주제곡 가사 중 일부다. 노래의 제목 ‘낙인’이 암시하는 것처럼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대 초반 조선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47%가 노비였던 시절, 노비 신분을 지우려고 도망쳤던 사람들이 다시 잡혀오면 그땐 얼굴 등 신체에 노비라는 낙인을 찍어 평생을 꼼짝하지 못하게 상처를 만들었다.

그로부터 400여 년이 지난 지금 e메일이나 문자메시지, 트위터 등이 개인 간의 소통방식으로 일반화됐는데, 한번 흔적을 남기면 지우고 싶어도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특성에 따라 또 다른 형태의 디지털 낙인이 돼가고 있다. 물론 디지털 소통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편리함은 과거의 자동차나 비행기 같은 혁명적인 교통수단의 발명 이상으로 큰 것이 사실이다.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직전인 1990년대 초반 유학생활을 했던 필자는 비싼 국제전화요금을 아끼기 위해 부모님께 편지를 띄우면 답신을 받기까지 20여 일을 기다려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는 아프리카 사막 한가운데서도 문자를 보내고 실시간 화상대화로 세계 어디라도 소통이 가능한, 놀라운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편리함의 이면에는 개인의 명예가 짓밟히고 사생활이 침해되는 등 불편함 역시 커져가고 있다. 기억이 생생한 ‘개똥녀’ 사건의 당사자와 작년 케이블TV에 소개돼 논란을 일으켰던 ‘4억 명품녀’의 개인정보가 일명 ‘신상털기’를 통해 알려지는 등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개인의 사생활을 들추는 온갖 추잡한 일이 갈수록 늘고 있다. 특히 한번 인터넷 등에 유포된 정보는 설령 거짓된 내용이라도 거두어들일 수 없는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어 본질적인 대안이 나오기 전까지 피해는 계속 커져갈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유럽 국가들은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글로벌 사이트를 상대로 자국의 인터넷 이용자들이 자신과 관련된 정보를 원하면 삭제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인 ‘잊혀질 권리’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아직은 선언 수준이지만 앞으로 이들 국가와 해당 기업 간의 법정 소송으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표현의 자유를 악용해 개인들의 정보를 거래해온 글로벌 사이트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게 결론이 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인터넷 강국이라고 자부해온 우리나라가 심각한 상황이라는 점이다. 공인의 개인정보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인들마저 모두가 서로에게 노출된 채 각종 피해사례가 증가하고 있는데도 지금껏 정부 차원의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정부와 포털 사업자를 포함한 정보유통업체, 그리고 이용자들이 해법을 도출해야 한다. 이를 통해 표현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일정 기간 미니홈피나 페이스북 등을 사용하지 않는 회원들에게 우선적으로 글 삭제 요청에 대한 조건 없는 수용 등 기초적인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더불어 개인들이 올려놓은 자료를 동의 없이 영리 목적으로 거래하는 행위를 금지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잊혀질 권리’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그래야만 400여 년 전 인간답게 살기 위해 마지막 수단으로 도망을 쳤던 노비들 이상으로 고통을 받으며 사이버공간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21세기형 피해자들의 권리를 찾아줄 수 있을 것이다.

성동규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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