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칼럼니스트
두 축구영웅 이충성과 이유형 씨
극적인 골이었다. 호주와의 결승전이 0-0인 채로 연장전 후반에 돌입했을 때, 교체 투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충성 선수가 호쾌한 발리슛을 골문으로 찔러 넣었다.
재일한국인 4세로 도쿄에서 태어나 자랐고, 마침내 일본프로축구 J리거가 된 이충성. 한때 한국 청소년국가대표로 뛴 적도 있는 그가 국적을 바꿔 일본 국가대표가 된 데 대해 복잡한 시선도 쏟아졌지만 그의 슛이 가져다준 임팩트에는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정확히 100년 전인 1911년에 태어난 이 씨는 경성축구단에서 대활약을 했고 1935년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듬해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본 대표팀에 선발된 한국인 선수는 단 한 명뿐. 눈물을 삼킨 이 씨는 식민지 지배의 비애를 맛봐야 했다.
1945년 광복 후 일한 양국이 격돌한 것은 스위스 월드컵 출전권을 놓고 다툰 1954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 선수단의 한국 상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경기 모두 일본에서 열리게 됐다. 한국대표팀 감독이었던 이 씨는 이 대통령으로부터 “패하면 대한해협에 몸을 던져라”라는 말을 들었다. 이 씨는 당시의 비장했던 각오를 되살리며 나에게 일한전 얘기를 해줬다. 고군분투한 끝에 한국 팀은 1승 1무로 일본을 누르고 월드컵 티켓을 손에 넣었다. 그 후 일본은 연달아 한국에 고배를 마시며 1998년 프랑스 월드컵까지 출전을 저지당했다.
일본인으로서 월드컵에 못 나가고 이후 굴욕을 씻었던 인물이 이유형 씨라면, 국적을 바꿔 일본의 영웅이 된 인물은 이충성이다. 그것은 시대의 변화가 가져온 하나의 길이 아니겠는가.
내가 잘 아는 S 씨는 민족의식이 강한 재일한국인 여성이다. 한국이 승부차기에서 일본에 패했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TV 앞에서 고함을 질렀을 정도이지만, 결승전에서 이충성이 일본에 승리를 안겨준 순간엔 그때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색다른 느낌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관중석에서는 일본인 서포터들이 큰 환성을 지르며 일장기를 흔든다. 운동장에서 일본 선수들이 기쁨에 뒤엉켜 얼싸안고 있는 상대는 아들과 같은 세대의 동포가 아닌가. “저 아이가 일본에 영광의 관을 안겼다. 일본인 모두가 이를 기뻐하며 인정해주고 있다. 게다가 Lee라는 이름 그대로. 이런 광경은 이전엔 본 적이 없다.”
부끄럽지만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아직도 남아있는 일본사회에선 일본식 이름(통명·通名)을 쓰는 재일한국인이 많다. 하물며 일본 국적을 취득하게 되면 개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청년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국적은 바꾸더라도 민족은 버리지 않겠다는 결의 때문이다. 忠成(충성)은 일본어로 ‘다다나리’라고 읽히게 됐지만 유니폼의 이(李) 표기는 일본식 Ri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Lee를 고집했다.
재일한국인 4세인 그는 한국어가 유창하지 않다. 일본에서 자랐기 때문에 사고방식도 어쩔 수 없이 일본인에 가깝다. 그 때문에 한국 청소년국가대표 시절에는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반 쪽발이’라고 불려 괴로워하기도 했다.
S 씨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조국의 말을 배우고자 꿈에 그리던 서울에 유학했던 젊은 시절, “한국인이라면서 말이 왜 그렇게 어눌한가” “이런 것도 모르나” 등의 말을 자주 들었다. “우리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니다”라고, S 씨는 재일한국인의 입장을 통감했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S 씨는 고민을 거듭한 끝의 이 선수의 결단을 충분히 이해한다. “장래를 생각하면 지금의 젊은이들에겐 이런 길도 있겠구나”라고.
그것은 다양성을 서로 인정하는 사회를 만든다는 의미에서 일본에도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Lee라는 이름을 영웅으로 삼은 일본사회가 그의 생각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 일본인에게 부과된 책임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