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욱 논설위원
허주는 지인들에게 박 의원을 두 차례 만나 여러 얘기를 나눴다고 털어놨다. 두 사람이 나눈 자세한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크게 두 갈래로 집약됐다고 한다.
“권력을 잡으려면 세력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조직과 자금을 확보해야 한다.”(허주)
허주가 2000년 창당한 민국당에 자금을 댔던 J 씨는 공교롭게 박 의원이 2년 뒤 한나라당을 탈당한 후 만든 한국미래연합의 든든한 자금줄이었다. 정치권에서는 이 사실을 예사롭지 않게 보는 시각이 많았다. 박 의원과 허주 사이가 정치적 동맹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반(反)이회창 전선에는 함께 섰다. 박 의원이 2002년 이 총재를 제왕적 총재라고 비판하면서 독자 창당한 것은 ‘이회창 대세론’에 파열음을 낸 사건이었다. 박 의원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개혁 요구가 수용되자 복당했지만 이회창 후보는 끝내 노무현 돌풍의 벽을 넘지 못했다. 허주는 2002년 대선이 끝난 뒤 1년이 지나 저세상 사람이 됐다.
박 의원의 잠재력은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대표(2004∼2006년)로 정치 전면에 등장하면서 빛을 발했다. 탄핵 역풍과 ‘차떼기’ 대선자금 후폭풍 속에서도 박 전 대표가 호소한 ‘거여(巨與) 견제론’이 막판 표심을 뒤흔들면서 한나라당은 제1야당(121석)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2007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석패하긴 했지만 그의 ‘명분 정치’는 요즘 부동의 1위를 굳히고 있는 ‘박근혜 대세론’의 뿌리가 됐다.
이회창 대세론에 결기 있게 맞섰던 지난날의 박 의원이 요즘 대세론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박 전 대표의 생각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친박(친박근혜) 진영 일부에선 벌써부터 대세론에 취한 듯한 모습이 심심찮게 포착되고 있다. 작년 조기 전당대회 개최 여부를 놓고 일부 친박 중진들이 자신의 유불리만 따져 바람잡이에 나선 것이나, 작년 12월 말 출범한 친박 싱크탱크 국가미래연구원의 주도권을 놓고 친박 인사들 간에 벌어진 신경전은 낯 뜨거운 일이었다. 박 전 대표를 향한 친박 인사들의 과도한 충성경쟁도 볼썽사나울 정도다.
박 전 대표나 친박 진영이 대세론에 안주하면 할수록 국민의 뒤집기 욕구가 커질 수 있다. 일종의 착시(錯視)현상이 굳어지면 국민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역대 대선 레이스에선 1등 후보를 겨냥한 혹독한 검증이 예외 없이 뒤따랐다. 국민이라는 바다는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기도 한다. 1997년 대선에서 변화와 개혁의 ‘아이콘’으로 주목을 받았던 이회창 후보가 불과 5년 뒤 개혁의 대상으로 내몰린 사실을 곱씹어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