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신에 올라탄 시위대 21일 리비아 벵가지에서 반정부 시위대원들이 탱크의 포신 등에 올라가 손가락으로 승리의 V자를 그리고 있다. AP는 이 사진을 리비아 내 한 소식통으로부터 얻었다고 밝혔다. 벵가지=AP 연합뉴스
궁지에 몰린 카다피 정권은 21일 새벽 대국민 연설을 통해 “이대로 가면 내전”이라고 밝혀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임을 경고했다. 대규모 추가 희생자 발생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국제 사회는 카다피 정권에 자제를 촉구하고 나섰다.
○ 순식간에 카다피의 문 앞까지
반정부 시위의 중심지였던 제2도시 벵가지는 20일 이후 시위대가 장악했다. 보안군은 20일 벵가지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한 수천 명의 반정부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사하며 시위를 잠재우려 애썼으나 결국 통제권을 상실했다. 반정부 시위대는 폭탄을 가득 실은 차량 등을 이용해 벵가지 시내 군 기지를 공격했고 보안군이 실탄을 발사하면서 시위대와 군인 모두가 큰 피해를 보았다. 현지 의사는 이날 집단 발포로 60여 명이 숨졌다고 전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벵가지를 손에 넣은 반정부 시위대는 “리비아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활보했다. 차들도 경적을 울리며 벵가지가 해방된 것을 축하했다. 시위대는 보안군 기지로 몰려가 무기를 탈취하기도 했다. 경찰이 거리에서 사라진 뒤 벵가지의 치안이 극도로 악화되자 청년 자원봉사자들이 자경대를 만들어 질서 유지에 나섰다. 1980년 5월 한국의 ‘광주’를 연상케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패퇴한 친정부 시위대는 몰래 불을 지르는 등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항구도시 벵가지는 왕조시대의 수도 가운데 한 곳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1000회 이상의 공습을 받아 크게 파괴됐다. 1950년대 말 석유가 개발되면서 급속히 발전했으나 카다피 정권 치하인 1996년 보안군이 정치범 1200여 명을 학살한 ‘아부 슬림 수용소 총격사건’ 이후 대표적인 ‘반카다피 도시’가 됐다. 카다피 국가원수의 고향인 시르테가 시위대에 함락됐다는 보도도 나왔으나 AFP통신은 목격자들을 인용해 사실이 아니라고 전했다.
리비아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 이후 외국 언론의 입국을 막고 인터넷을 차단하는 등 철저하게 보도를 통제하고 있어 외신들은 현지 주민들의 말을 인용해 관련 뉴스를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이번 시위로 최소 233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프랑스 인권단체 ‘국제인권연합’은 사망자가 300∼400명에 이른다고 21일 밝혔다. 그러나 카다피 국가원수의 차남인 사이프 알이슬람은 대국민 연설에서 “언론에서 보도되는 사망자 수는 크게 부풀려진 것”이라며 “현재까지 84명이 숨졌다”고 말했다.
카다피 정권은 벵가지에서 군 일부가 이탈해 시위대의 편에 서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벵가지에서는 현지 부대를 돕기 위해 보낸 지원 병력의 일부가 곧바로 시위에 가담했다. 시위대는 자신들 편에 선 군인들이 보유한 군 탱크를 앞세워 카다피 국가원수 쪽 군부대를 공격하기도 했다.
무스타파 압델 잘릴 리비아 법무장관이 21일 강경진압에 항의해 사임했고, 해외 주재 대사들도 잇달아 카다피 정권에 등을 돌렸다. 압델 에후니 아랍연맹 주재 리비아대사는 20일 “카다피는 끝났다. 그는 국민을 잃었기 때문에 하루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며 사임했다. 중국 주재 리비아대사관 고위 외교관인 후세인 사디크 알 무스라티도 21일 사임 의사를 밝히고 모든 외교관의 사임을 촉구했다. 인도 주재 리비아대사인 알리 알 에사위도 이날 무력 진압에 반발해 사임 의사를 표명했다.
유럽연합(EU) 국가들은 자국민 대피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국제 유가도 크게 출렁거리고 있다.
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