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서류 2통 떼는 데 30분… “주민센터 용어-절차 너무 복잡”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한국어를 잘 아는 편이어서 의사소통에 큰 지장이 없다. 올해는 귀화시험을 치러 국적을 취득할 예정. 그러나 혼자서 공공기관을 이용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매번 남편이나 시어머니가 동행해 서류를 작성하거나 신청했다.
마오 씨는 지난달 25일 경기 지역의 주민센터를 찾았다. 동아일보 취재진의 요청으로 가족관계증명서와 주민등록등본을 1부씩 떼보기로 했다. 난생처음 혼자서, 한국에서 민원서류를 발급받는 데 도전한 셈이다. 그는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증명서 발급 창구로 다가갔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받으려고 합니다.”
“본인 것인가요? 국적은 취득했나요?”
“아니에요….”
“그러면 남편 것을 떼야 해요. 서류 여기 표시된 데 쓰시면 돼요. 신분증 주시고요.”
가까운 곳에 ‘홍길동’이라는 이름이 적힌 견본양식이 있었지만 외국어로 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캄보디아어 견본은 물론이고 어떤 종류의 외국어 견본도 없었다.
약간 주눅이 든 마오 씨는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삐뚤빼뚤한 글씨였지만 별 막힘 없이 이름과 주소를 썼다. 청구 이유가 적힌 항목에서 펜이 멈췄다.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몰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애타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직원들은 자기 일 하기에 바빴다. 기자의 도움으로 ‘회사 제출용’이라고 적었다.
다음은 주민등록등본. 가족관계증명서를 신청한 경험 덕분에 이번에는 조금 빨리 서류를 만들었다. 서류 2통을 떼는 데 30분이 걸렸다. 내국인이었으면 2, 3분도 걸리지 않았을 일이다. 마오 씨는 “처음이라 많이 떨렸는데 다행”이라며 “앞으로 혼자서도 일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어렵게 받은 서류지만 마오 씨가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많다. 가족관계증명서에는 모든 가족의 이름이 한글과 한자로, 마오 씨의 이름이 한글로 나와 있다. 마오 씨의 외국인등록증에는 ‘MAO’라고 씌어 있다. 모두 공공기관이 발행했지만 표기가 다르다.
주민등록등본에는 아예 이름이 없다.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외국인 신분이기 때문이다. 외국인인 결혼이주여성이 등본에 오르려면 남편이 별도로 신청해야 한다. 주민등록번호가 있는 사람만이 기재될 수 있어서다.
마오 씨는 “등본에 남편하고 아이들이 다 적혀 있고 나만 빠진 것을 보면 기분이 조금 그렇다. 열심히 공부해서 빨리 국적을 취득하고 싶다”고 말했다.
○ 일부 주민센터서는 통역 서비스
행정기관을 이용하면서 느끼는 불편은 마오 씨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이런 점을 감안해 1, 2년 전부터 많은 지방자치단체와 기관이 제도 개선을 건의했다. 그러나 관련 부처가 행정의 원칙을 앞세우면서 가로막혔다.
예를 들어 외국인등록증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여권의 인적사항을 근거로 만들므로 이름을 영어로 표기할 수밖에 없다, 가족관계등록부는 한국인의 신분관계를 증명하는 공문서라 영문자 도입이 적절치 않다는 식이다.
정보기술(IT)을 기반으로 하는 행정서비스는 점점 좋아지지만 결혼이주여성은 이용법을 전혀 몰라 답답해한다. 몽골 출신의 이라 경기도의원(34·여)은 “출입국 관련 업무 등 일부 분야에 제한된 통역·번역 서비스를 일상 생활민원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기 안산시 단원구 원곡본동을 찾아가봤다. ‘국경 없는 마을’로 불리는 국내 최대의 다문화지역. 정식으로 등록된 외국인이 1만6000명에 이른다. 불법 체류자를 포함하면 6만 명의 외국인이 안산시에 산다.
원곡본동 주민센터는 1월부터 중국어 통역봉사자를 배치했다. 한자와 베트남어로 된 민원서류 견본양식도 만들었다. 주민센터마다 모든 언어의 통역사를 두기는 어려워서 외국어 견본양식을 만들었다.
행정안전부는 다문화가정을 위한 민원24(www.minwon.go.kr) 사이트를 만들어 올해부터 운영하고 있다. 입국부터 취업 혼인 한국어교육 자녀양육 등 한국 생활에 도움이 되는 모든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아직까지는 한글 서비스만 가능해 한국어에 서툰 외국인은 가족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행안부 관계자는 “공급자 위주에서 수요자 위주로 민원안내를 바꾸려 한다”며 “외국어로 된 내용을 늘리는 등 정보제공에 더 많이 신경을 쓰겠다”고 말했다.
안산=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 취업의 벽에도 웁니다 ▼
공공기관 통한 취업 5.6%뿐… “경력 살린 일자리 안내 필요”
결혼이주민들이 모여 각국 음식과 수공예품을 파는 인천 남동구의 ‘다양한 가게’에서 일하는 충리샤 씨(오른쪽). 미용실을 운영하는 것이 꿈인 그는 “이주 외국인들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천=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결혼이민자 12만9112명을 대상으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09년 조사한 자료를 보면 취업자는 40.2%에 그쳤다. 그나마도 임시 일용직이 절반(51.6%)을 넘었다. 취업 관련 정보를 얻는 데부터 난관을 겪기 때문.
이들은 주로 친구나 지인(33.6%)을 통해 취업정보를 구했다. 공공기관에서 안내를 받았다는 비율은 5.6%뿐이었다.
충리샤 씨(45·여)는 한국에 오기 전, 중국 산둥 성의 미용실에서 7년 동안 일했다. 미용기술을 더 배운 뒤 중국에 돌아가 미용실을 차릴 계획을 세우고 2003년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미용실에서 일하기 어려웠다. 2005년 한국인을 만나 결혼을 하면서 꿈은 더 멀어졌다. 아이 돌보랴 집안일 하랴, 취직은 엄두도 못 냈다.
그는 “말도 안 통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방법도 몰랐다. 결혼이민자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2003년 결혼한 뒤 중국에서 한국에 들어온 김은화 씨(34·여)도 “일자리 관련 정보를 얻는 것부터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정부가 손을 완전히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결혼이민자를 위한 진로설계 지원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올해는 결혼이민자를 채용하는 사업주에게 고용촉진지원금을 주고 직업교육훈련생을 뽑을 때 우대하는 사업도 추진할 방침이다.
여성가족부도 ‘여성 새로 일하기 센터’에 등록한 결혼이민 여성을 6개월 동안 채용한 기업에 월 50만 원을 지급하는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정부 대책이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단순한 일자리에 치중해 효과가 적다는 지적이 나온다. 모국에서 쌓은 경력을 이어주는 등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말이다.
일본 규슈에서 1996년 한국으로 시집 온 이시카와 하다코 씨(48·여)는 “주변에 간호사나 유치원 교사를 하다 한국에 온 사람이 많지만 전과 같은 일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언어·문화적 차이로 이주민이 일자리를 얻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교육이나 취업 지원을 통해 경험과 노하우를 살릴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는 시혜식이 아닌 맞춤형 지원으로 나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박승헌 기자 hpark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