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논설위원
교수가 학생이었던 시절엔 교수실에 불려가 차 한잔 얻어 마시면 영광이었다. 뜻밖에 학점 올리기나 유학 도움을 받는 일도 생겼다. 하지만 비슷한 시절을 보낸 어른들은 지금 공식적 모임에선 물론이고 가까운 이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눈을 내리깔고 휴대전화만 들여다본다.
2009년 국내에서 스마트폰이 가동하기 전까지만 해도 문자만 챙기는 게 고작이었다. 이젠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신문 읽기에, 업무처리까지 하느라 앞에 앉은 사람은 안중에 없다. 스마트폰 없는 사람은 심심할 판이다. 이러려면 왜 바쁜 시간에 모였을까, 했더니 내 옆에서 스마트폰을 톡톡거리던 이가 말했다. “나 없을 때 중요한 얘기 나올까 봐 그렇지.”
페이스북의 친근감 믿을 수 있나
문자에 비하면 불쑥 걸려오는 전화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이다. 미국선 휴대전화를 걸기 전에 “전화 걸어도 되나요” 문자를 먼저 보내는 게 에티켓이 됐다. 가족 아닌 사람이 예고 없이 전화하는 건 무례로 간주되기도 한다. 아주 중요하거나 급한 일이 아닌 한, 몸소 전화를 하는 일은 시간과 에너지 소비량이 많은 서비스 비즈니스가 된 것이다.
25년 전 앳된 가수 이선희는 ‘알고 싶어요’라는 노래에서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하고 물었다. 그 옛날 황진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소세양에게 써 보냈던 한시에서 ‘바쁜 중 돌이켜 생각함이라 괴로움일까 즐거움일까’(忙中要顧煩或喜)라고 한 것을 작사가 양인자가 당시로선 현대적으로, 그렇게 번안했다. 하지만 요즘 같은 디지털시대엔 먹힐까 의문이다.
이게 스마트폰의 패러독스다. 1970년대부터 테크놀로지와 인공지능을 연구해온 셰리 터클은 새 저서 ‘홀로 또 같이’에서 “문자처럼 개인이 ‘통제하는 관계’가 디지털시대의 대세라는 것이 오히려 우리를 외롭게 한다”고 했다.
반면 바쁠 때 전화한 애인이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엽다면, 그들의 감정이 통하기 때문이다. 연애 초기의 애인이나 만만한 친구, 가족은 내가 ‘통제하기 힘든’ 존재다. 때로는 귀찮고 부담스럽다. 이성적으로 이해해도 감정으로는 어쩔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통제하지 않는 관계가 우리를 외롭지 않게 한다. 딸이 짜증을 낼 걸 알면서도 엄마는 굳이 전화해 잔소리를 하기 때문에 끈끈한 관계인 거다.
영화 ‘소셜 네트워크’에서 마크 저커버그가 페이스북을 만든 것도 친구가 없어서였다. 트위터의 최고경영자(CEO)였던 에번 윌리엄스도 수줍어 말을 잘 못하는 성격이어서 커뮤니케이션을 쉽고 편하게 해주는 트위터에 빠졌다. 스마트폰 속에 천 사람의 팔로어를 거느렸대도 내가 기다리는 단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외로울 수밖에 없다.
이성보다 감정, 기계보다 사람
9일부터 SKT가 아이폰4 예약을 받는다. 스마트폰이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 건 틀림없다. 하지만 행복하게 해주기까지는 바라지 않는 게 좋겠다. 늘 이성과 경쟁력을 강조했던 뉴욕타임스의 우파논객 데이비드 브룩스는 최근 “결혼이나 대통령선거같이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판단은 이성 아닌 정서에 좌우된다”고 ‘감정적 전향’을 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