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덕
인삼하면 고려인삼이 최상품인 것처럼 더덕 역시 우리나라 것을 최고로 쳤다. 1123년에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간 서긍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에서는 날마다 밥상에 더덕이 올라온다며 크기가 크고 살이 부드러워 맛이 좋다고 감탄했다.
평소에는 더덕을 반찬으로 먹지만 약으로도 종종 쓰였다. 정조실록에 임금이 드실 탕약에 인삼 대신 더덕을 넣고 끓였다고 나오고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더덕이 변비에 좋다고 했다. 중국문헌인 식물명실도고(植物名實圖考)에는 젖나무(내樹)라고 기록해 놓았으니 예전 할머니들이 산모의 젖이 잘 나오지 않을 때 더덕을 먹이면 좋다고 한 것은 다 까닭이 있다.
맛도 좋고 몸에도 좋다니 훌륭한 아첨의 도구도 될 수 있다. 더덕 때문에 후손에게 두고두고 조롱을 당하는 조선의 정승이 있다.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한효순(韓孝純)이다. 더덕요리를 바쳐 정승 자리에 올랐다는 소리를 듣던 인물이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처음에는 더덕 정승의 권세가 드높더니/지금은 잡채 상서의 세력을 당할 자가 없다’라는 세간의 노래가 실려 있다.
더덕 정승은 더덕요리로 출세한 한효순을 비꼬는 말이고 잡채상서는 잡채를 바쳐 호조판서까지 오른 이충(李충)을 조롱하는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그 내용이 나오는데 광해군일기 11년(1619년) 3월 5일자에 한효순의 집에서는 더덕으로 밀병(蜜餠)을 만들고 이충은 잡채에 다른 맛을 가미했는데 맛이 독특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꿀 밀(蜜)’에 ‘떡 병(餠)’자를 썼으니 더덕을 까서 방망이로 두드린 후 찹쌀가루를 입혀 기름에 지진 후 꿀로 버무린 더덕강정에 가까운 음식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어쨌든 임금의 총애를 받을 정도였으면 그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던 모양이다.
더덕으로 음식을 만들어 바쳐서 출세를 했다며 간신의 대명사로 후손에게 욕을 먹는 한효순이지만 임진왜란 때는 용맹을 떨치며 큰 공을 세운 장수였다. 왜의 수군을 격파해 경상좌도 관찰사로 승진을 했으며 작전이 담대해 적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통제사인 이순신 장군의 추천으로 수군의 병참과 군량을 담당하는 등 조선 수군 발전의 숨은 공로자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음식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