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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카페]백번 할말 없는 통상교섭본부의 오역

입력 | 2011-03-09 03:00:00


정혜진 경제부 기자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가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을 앞두고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번역 오류 문제로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시작은 숫자 오류였다. 지난달 말 한-EU FTA에 규정된 품목별 원산지 기준 중 완구류 및 왁스류의 역외산 재료 허용 기준이 영문본 협정문에선 50%, 국문본 협정문에선 각각 40%, 20%로 돼 있는 것이 발견됐다. “실무적 실수”라며 먼저 국회에서 비준을 하면 후에 정정을 하겠다던 외교부는 비판이 거세지자 4일 만에 입장을 바꿔 지난해 10월 국회에 제출한 비준동의안을 철회하고 번역 오류를 정정한 새 협정문의 비준동의안을 다시 제출했다.

그러나 이번엔 본래 합의에 없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 오류가 발견됐다. 외국건축사 자격취득자와 관련된 규정에 영문본에는 없는 ‘5년 실무수습을 한’이란 문구가 한글본에는 포함된 것. 신용평가서비스와 관련된 규정에는 단순히 ‘서비스의 공급을 금지하거나 제한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영문본이 ‘서비스의 공급을 금지하거나 제한하지 않는 것에 (정부가) 동의할 수 있음’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서비스 분류 번호의 오타, 표현의 오역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이어 이전에 타결된 다른 나라와의 FTA 협상문 한글본의 오류까지 잇따라 터져 나왔다.

결국 통상교섭본부는 EU 측과 FTA 협정문 한글본의 일부 오류를 정정하기로 급히 합의하고 간부들이 나서 여야 국회의원들에게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는 등 진화에 나섰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이시형 통상교섭조정관 등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외교부의 속내는 조금 다른 듯하다. 협상이 끝나면 영문본을 먼저 공개한 뒤 국민의 ‘성화’에 못 이겨 서둘러 한글본을 만들어야 한다는 시간의 제약, 번역을 전담하는 팀도 아닌 고유 업무가 있는 사무관급 직원들 10명 이내로 꾸려진 태스크포스(TF)팀이 번역을 해야 하는 인력상의 제약을 이유로 억울함을 토로하는 목소리도 많다. 한-칠레 FTA 당시 칠레 쪽에서 스페인어판에 오류를 냈던 사례를 들어 일부 언론과 야당에서 사건의 본질에 비해 지나치게 비판의 강도가 높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한 외교부 관계자는 “길 가다 껌 뱉은 사람한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격”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백번 양보해 외교부의 시간과 인력상 제약을 인정하더라도 협상 이후 첫 국내 절차인 한글본으로의 번역에 각종 실수를 걸러내는 시스템이 아예 없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전문적인 해석 능력과는 무관한 숫자나 오타 같은 실수들은 외부로 보낼 것까지도 없이 내부에서 한 번만 다시 살폈다면 사전에 고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그때 번역에 참여하는 인력이 달라지는 것도 문제다. 한미 FTA의 경우 10여 명의 직원이 석 달에 걸쳐 1차 번역을 마친 뒤 대형 로펌에 다시 한 번 오류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그러나 한-EU FTA의 경우는 5∼7명의 사무관이 두 달 남짓한 기간에 번역을 마친 뒤 바로 국회에 제출했다. 지켜보는 눈이 많은 한미 FTA와 달리 여론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한 한-EU FTA에는 노력을 소홀히 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는 대목이다.

그나마 8일 김 통상교섭본부장이 기자간담회를 자청하고 번역 상시팀 구성, 외부 전문가에게 외주를 주는 방법 등 시스템 개선 계획을 밝힌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인해 외교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감 훼손은 단기간에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정혜진 경제부 기자 hye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