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도예가 드 발의 ‘호박눈을 한 토끼’
이야기는 저자가 증조부로부터 물려받은 264점의 일본 네쓰케(根付·17세기 일본의 옷매듭 장식용 미니어처 조각품)에서 시작한다. 이 네쓰케가 드 발의 가문에 처음 등장한 것은 140년 전 파리에서였다. 1870년대 예술비평가로 작가 프루스트, 화가 마네 등과 친분을 가졌던 찰스 에프러시는 당시 파리를 강타한 일본 문화의 열풍 속에서 이 네쓰케들을 처음으로 구입했다. 이후 찰스는 그의 사촌인 빅터(드 발의 증조부)의 결혼 선물로 이들 네쓰케를 오스트리아 빈으로 보낸다.
이후 네쓰케는 빈에 있는 빅터와 그의 부인 에미의 화려한 아파트 한쪽을 장식하지만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작은 장난감 이상의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패하고, 무장한 괴한들이 빅터의 아파트에 침입해 귀중품들을 훔쳐가는 난리통 속에서 네쓰케는 신통하게도 손상 없이 원래 있던 자리를 지킨다.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빅터와 그의 딸 엘리자베스는 영국으로 이민을 간다. 전쟁이 끝난 후 엘리자베스는 남아 있는 물건들을 찾기 위해 빈의 아파트로 돌아오는데 전쟁의 폐허 속에 대부분의 물건이 사라졌지만 가족의 하녀였던 안나가 네쓰케를 잘 간직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매혹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크기의 네쓰케가 20세기의 온갖 시련을 거쳐 가며 다섯 세대 동안 살아남아 지난 가족들의 역사를 이야기해준다는 점이다. 빅터의 아이들이 잠시 가지고 놀다 흥미를 잃고 어느 구석 속에 던져두었던 네쓰케가 그 아이들보다도 오래 살아남아 지금은 가보로 물려 내려오고 있다.
요즘처럼 한 번 쓰고 버려지는 물건이 흔한 시대에 이 책은 우리 주변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지금 내가 차를 마시고 있는 찻잔도 다섯 세대를 거치고 나면 나의 후손이 애지중지 모시며 그 찻잔이 담고 있는 우리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책을 쓰고, 그 책으로 문학상을 수상할지도 모를 일이다.
런던=안주현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