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논설실장
한지는 일견 극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에 더 잘 어울릴 소재다. 임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며 취재한 다큐멘터리적 요소가 영화 곳곳에 녹아 있다. 여자 주인공도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영화의 스토리는 조선왕조실록 4대 사고(史庫) 중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전주사고 보관본을 전통한지로 복원하는 실화를 뼈대로 삼았다.
요즘 젊은 관객은 할리우드 영화류의 빠른 템포와 떠들썩한 재미에 길들여져 있다. 임 감독을 만나보면 이런 영화의 흐름을 거역하려는 오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번 한지 영화도 그런 외고집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임권택 101번째 영화와 강수연
내가 이 영화의 개봉을 기다린 또 하나의 이유는 40대 중반에 접어든 강수연이 어떤 매력으로 관객에게 다가올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강수연은 20대 초반에 ‘씨받이’(1987년)와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년)로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둘 다 임 감독 작품이었다. 20대 초반에 월드스타로 불리다 최근 영화를 거의 쉬고 있던 그가 22년 만에 임 감독과 영화에서 다시 만났다. 둘은 감독과 배우 사이라기보다 영화의 도를 사사(師事)하는 스승과 제자 같다.
나는 전주 촬영현장으로 임 감독을 찾아갔다가 강수연의 실물을 처음 보았다. 기자라는 직업 탓에 탤런트와 영화배우를 직접 만날 기회가 더러 있었지만 여자 탤런트의 경우에는 텔레비전에서 보던 이미지와 차이가 커 실망할 때가 많다. 그러나 월드스타급 영화배우는 단순히 예쁜 게 아니라 사람을 흡인하는 파워가 있다. 임 감독은 절정의 시기를 지난 40대 중반의 여인이 은은하게 뿜어내는 매력을 잡아내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강수연은 영화에서 심심한 일상의 연기를 한지에 먹물이 배어나듯 자연스럽게 표출한다.
박중훈도 코미디와 액션물 배우로서의 패턴에서 벗어나 다큐멘터리 영화 속의 인물 같은 역을 통해 변신을 시도한다. 박중훈이 강수연의 서울 집에서 외도(外道)를 시도하다 미수에 그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임 감독의 해설에 따르면 외도는 일상의 삶 속에서 떠올랐다 잠겼다 하는 충동 같은 것이다. 임 감독은 “두 남녀가 사랑의 행위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든, 다음에 만나 완성했든, 그것을 문제 삼는 영화는 아니다”며 “정신생활과 육신의 삶에서 남녀의 충동이 큰 비중으로 확대되는 것을 경계했다”고 부연했다. 이런 여백의 철학, 절제와 느림의 미학이 화끈한 눈요기에 익숙한 관객에게 얼마나 친숙하게 다가설지는 모르겠다.
한국영화 대를 잇는 영화가족
이 영화에는 ‘숨은 그림 찾기’ 하는 재미가 있다. 임 감독의 부인 채령 씨는 MBC 탤런트 3기 공채 출신으로 임 감독의 ‘요검’(1971년)으로 데뷔했다. 채 씨는 전주 촬영현장에서 배역을 찾던 남편의 부탁으로 지공예공방 주인으로 잠깐 영화에 출연했다. 주요 투자자인 송하진 전주시장과 장제국 동서대 총장도 영화에 단역으로 나온다. 부산의 동서대는 임권택영화예술대학을 2008년 설립해 임 감독을 석좌교수로 초빙했다.
75세의 노장감독이 45세 동갑내기 남녀 주연배우와 함께 극적 요소에 의존하지 않는 극영화를 만들었다. 새로운 시도가 자기만족에 그칠지, 공감대가 넓은 대리만족을 끌어낼지는 변덕스러운 관객이 결정할 몫이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