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중 공포’… 그러나 통곡도 사재기도 약탈도 없었다
대지진이 일본 열도를 강타한 11일 오후 2시 46분 도쿄 세타가야(世田谷) 구의 한 대형할인점. 카트를 몰며 평온하게 쇼핑을 즐기던 재일한국인 이모 씨(44·여)는 건물이 무너질 듯 기우뚱하며 심하게 요동치자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싼 채 몸을 낮췄다. ‘이국땅에서 이렇게 꼼짝없이 죽는 구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갈 때쯤 겨우 흔들림이 진정됐다.
쇼핑객과 점원 모두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왔다. 이 씨도 카트를 남겨둔 채 비상구를 이용해 거리로 나왔다. 겨우 진정되고 나서야 이 씨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래서 일본이 선진국이구나….’ 대지진이 닥쳐도 누구 하나 소리를 지르거나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출렁대는 ‘지진 소음’이 전부였다. 할인점의 물건을 무단으로 갖고 나오는 사람조차 한 명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쇼핑하던 물건을 제자리에 내려놓은 채 ‘들어올 때 차림 그대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대지진이나 대화재가 발생하면 흔히 범죄와 약탈, 무질서가 횡행한다는 얘기는 적어도 일본에선 ‘먼 나라 얘기’였다.
12일 오전 이 할인점이 다시 문을 열었지만 쇼핑객이 평소보다 2배 정도 늘어났을 뿐 과도하게 사재기를 하거나 새치기를 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인근의 대형백화점 식료품점도 사정은 비슷했다. 평소보다 사람이 많이 몰려드는 바람에 혼잡했지만 산더미처럼 식료품을 사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손님들은 오히려 평소보다 더 조용했고 점원은 여전히 친절했다.
도쿄 지하철의 모습도 침착함 그 자체였다. 대지진이 급습한 11일 오후 내내 지하철이 멈췄고 퇴근하지 못한 사람들이 몰렸지만 모두 긴급 상황을 이해하고 안내에 협조했다. ‘대중교통으로 퇴근하기 힘드니 개통될 때까지 안전한 직장 건물에 머물러 달라’는 당국의 방송안내와 직장 구내방송에 따라 상당수는 사무실에 대기했다. 집이 가까운 사람들은 걸어서 귀가했다. 지하철 운행은 밤늦게 재개됐지만 수시로 정전으로 서고 내부가 깜깜해졌다. NHK방송 화면에 비친 승객들은 깜깜한 전철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짜증을 내거나 항의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당국은 사무실에서 침착하게 기다려준 시민들의 귀가를 돕기 위해 새벽까지 지하철 운행을 연장했다.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