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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의 새벽편지]의미 없는 고통은 없다

입력 | 2011-03-24 03:00:00


정호승 시인

‘자식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말이 있다. 얼마 전 눈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빠진 속눈썹 하나 때문에 아픈 거라며 빼주었다. 속눈썹 하나가 눈에 들어가도 아파 병원에 가는데 만일 자식을 눈에 넣는다고 가정한다면 그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런데도 우리 부모들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라고 한다. 나는 이 말을 두 아이의 부모가 되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예순이 넘어서야 겨우 부모의 사랑이 신의 사랑처럼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 말을 자식을 사랑할 때보다 잃었을 때 더 많이 사용한다. 잃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을 그토록 극명하게 ‘불가능한 가능’으로 표현한다. 그렇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은 그 부모만이 알 수 있을 뿐 아무도 헤아리지 못한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께서 남편을 잃은 해에 스물여섯 살 난 아들을 연이어 잃는 참척의 고통을 겪은 후 밥을 먹을 수 없어서 몇 달간 맥주만 드셨다는 말씀에서나마 조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신을 원망하다가 원망할 대상으로서의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문득 감사함이 느껴졌다는 말씀에서도 겨우 그 고통을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고통은 극복이 아닌 견디는 것”

한번은 어느 잡지에서 박완서 선생을 인터뷰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 기사에서 기자가 “선생님께서는 그러한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하고 묻자, 선생께서는 “그것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견디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읽는 순간 큰 감동을 받았다. 그동안 나는 고통을 극복하려고만 했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극복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능동의 결심과 투쟁적 행동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 내가 지금 어떠한 고통이든 참고 견디려는 노력의 자세를 지니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선생님의 그 귀한 말씀이 힘이 되었다.

누구든 고통 없는 삶은 없다. 그러나 어떻게 참고 견디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 있을 뿐, 고통은 그 의미를 찾는 순간부터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어린 자식을 잃고 비탄에 잠긴 젊은 부부에게 한 현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지금 당신들이 겪고 있는 그 일은 마치 끓는 물속에 던져진 것과 같습니다. 만일 당신들이 계란이라면 끓는 물 속에서 더욱 단단해지고 차차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게 되겠지요. 하지만 당신들이 감자라면 끓는 물속에서 더욱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지면서 탄력이 생기겠지요. 당신들은 어느 쪽이고 싶습니까?”

고통은 이렇게 선택적일 수 있다. 고통 앞에 어떠한 태도를 지닐 것인가 하는 문제는 바로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나 자신의 선택에 의해 고통이 계란처럼 굳어버릴 수 있고, 잘 익은 감자처럼 부드러워질 수도 있다. ‘고통은 동일하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도 나 자신의 선택에 의해 고통의 의미를 찾았을 때 성립될 수 있는 말이다.

지금 일본은 동북부 대지진 참사로 수만 명이 부모 자식을 잃은 큰 고통에 휩싸여 있다. 그래도 그들은 분노하거나 원망하기보다 불행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선택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이유 있는 고통은 있어도 의미 없는 고통은 없다는 것은 바로 지금의 일본인들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천안함 폭침사건 1년을 맞았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들을 수장당한 부모들은 지난 1년간 그 고통을 어떻게 견뎌 왔을까. “돌아올 거라 믿지 않으면 살 수 없어 오늘도 기다린다”는, “이사를 가면서도 숨진 아들이 찾아오지 못할 것을 걱정했다”는 데서 그 고통을 조금 알 수 있을 뿐이다. 세상 부모들이 겪는 가장 참혹한 고통은 바로 자식을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는 참척의 고통이다. 우리는 지금 이 시점에서 천안함 부모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함께 나누었는지 뒤돌아볼 때가 되었다. 행여 그 고통을 함께하기보다 ‘남남(南南) 갈등’으로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을 허비한 것은 아닐까. 남의 자식은 수장되어도 별로 아프지 않고, 내 자식은 수장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사회를 형성해온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이라도 아들 잃은 천안함 부모들의 손을 함께 잡아야 한다. 그래야만 천안함 폭침 사건에서도 국가와 개인의 고통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의미를 찾음으로써 더 이상 고통이 아닐 수도 있다.

천안함 부모들의 눈물 닦아줘야

향수 원료인 용연향은 원래 고래의 상처에서 발생된 부산물이다. 향유고래가 대왕오징어 등을 섭취하다 내장에 생긴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토해내면 역한 냄새가 난다. 그렇지만 그 배설물은 10년 이상 바다를 떠돌면서 염분에 씻기고 햇볕에 바짝 말라 아주 귀한 향수의 원료가 된다. 처음엔 비록 상처의 똥이었지만 오랜 세월 인고의 시간을 견딤으로써 고통의 향기를 지니게 된 것이다. 아마 고래의 똥은 자신이 왜 험한 바다를 떠도는지 그 고통의 의미를 알았을 것이다.

정호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