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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나만의 이야기로, 진솔하게 말하는 게 소통의 출발··· 감동은 그 다음

입력 | 2011-03-25 03:00:00

말 잘하라고 등 떠미는 시대의 생존법




반면 지금은 간결하게 구어체로 말하는 방식이 각광받고 있다.

프레젠테이션 방식의 변화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과거에는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1시간은 기본이었지만 요즘은 아무리 중요한 프레젠테이션도 30분을 넘지 않는다. 파워포인트 자료도 빈 틈 없이 빽빽하게 채워야 성의 있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최소한의 단어로 압축해 표현하거나 그림 하나만 그려 놓는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정근 제일기획 전무는 “예전에는 전문용어나 문어체를 많이 사용해야 효과적이라고 여겼지만 요즘에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단어로 말해야 더 설득력 있다”고 말했다.

유정근 제일기획 전무는 “핵심 내용을 강조하려면 중언부언하지 말고 다양한 표현으로 변주해 듣는 이들에게 ‘지루하지 않게 기억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자연스러움도 필수다. 과거에는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손은 가볍게 주먹을 쥐고 바지 옆선에 가지런히 놓은 차렷 자세로 군대 교관처럼 모든 내용을 힘주어 또박또박 말하는 방식이 정석으로 여겨졌다. 유 전무는 “요즘은 예의에 벗어날 정도가 아니라면 여러 동작을 자연스럽게 취하면서 목소리도 다양한 높낮이로 편안하게 말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를 하거나 ‘나의 통찰력’을 제시해야 감동을 줄 수 있다. 인터넷 등에서 각종 정보가 넘쳐 나기 때문에 누구나 찾을 수 있는 정보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내용의 진정성은 다른 어떤 요소보다 힘이 세다. 목사 아버지를 둔 목사의 경우, 아버지보다 더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설교를 할 때 아버지보다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버지는 교회를 개척하면서 겪은 온갖 어려움을 통해 삶에 대한 통찰과 깨달음을 얻어 이를 말로 풀어내기 때문에 설교에 울림이 있다. 반면 아들 목사는 그런 경험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교육 수준은 더 높더라도 말하는 내용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나 오프라 윈프리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도 말하는 주제에 맞춰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진솔하게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김은성 KBS 아나운서(스피치커뮤니케이션 박사)는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와 경험을 솔직하게 풀어내며 스스로를 먼저 열어 보이면 듣는 사람도 마음을 연다”고 말했다. 듣는 이가 마음을 연 후에야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설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사막 마라토너인 유지성 씨는 최근 활발하게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2002년 모로코 250km 사하라사막 레이스를 시작으로 고비, 아타카마, 남극 레이스까지 한국인 최초로 4대 오지대회를 완주한 그는 스포츠와 거리가 멀었지만, 리비아의 건설회사에서 근무할 때 우연히 방송에서 ‘사하라사막 마라톤’을 본 후 직장을 그만두고 달리기 시작했다. 풀코스 마라톤 한번 완주해 본적이 없는 그는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 사막 마라톤에 도전해 오지 레이스 개척자가 됐다.

전문 강사는 아니지만 유 씨의 강연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유 씨는 “강의 경험이 없어서 처음에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이 없었지만 내가 고생한 경험과 이를 극복한 과정을 이야기하자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근사하게 포장하는 것보다 진솔하게 말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 말하기 신화 깨기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토론하는 것을 익히는 미국 등과 달리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말하기 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편이다. 어느 순간 말하기가 중요해지면서 말하기에 대해 지나치게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도 많다.

김미경 아트스피치연구원 대표는 “말을 잘하려면 송년회에서 부를 노래를 준비하듯이 수차례 연습해 내용을 모두 숙지해야 한다. 또 자신의 감정까지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트스피치연구원 제공

두려움이 커지면서 말하기에 대한 고정관념과 선입관도 강해졌다. 고정관념과 선입관에 얽매이다 보면 정작 가장 중요한 ‘내용’에 중점을 두지 않게 된다.

특히 매끄러운 발음이나 세련된 동작 등 ‘하드웨어’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경우가 많다. 10여년 전 광고업계에서는 아나운서가 설명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를 자료 화면과 함께 보여주는 방식의 프레젠테이션이 잠깐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좋은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하면 설득력이 클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광고주들의 반응은 시큰둥했고 이 방식은 곧바로 사라졌다. 물론 사람이 나서지 않은 무인(無人) 발표 방식이 지닌 한계도 있었지만 목소리나 발음 등 ‘하드웨어’가 말하기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 즉 ‘내용’이다.

실수를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도 말하는 사람을 옭아맨다. 실수 없이 제한된 시간 내에 말하려고 원고를 달달 외우다보면 ‘청중과의 교감’을 놓치기 쉽다. 원고를 암송하는 이들은 눈동자를 약간 위로 올린 채 청중과 눈을 맞추지 않고 말한다. 말을 할 때는 청중과 골고루 눈을 맞추고, 그들의 반응을 살피며 목소리의 강약과 속도를 조절해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 감정이 공유돼야 설득력이 높아진다. 유정근 전무는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할 때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갸웃갸웃거리며 부정적 반응을 보이던 사람도 계속 눈을 마주치면 발표가 끝날 때쯤 태도가 호의적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고 강조했다.

듣는 이들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필요하지만 웃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자칫 독(毒)이 될 수 있다. 모 기업의 경우 프레젠이션을 맡은 직원이 초반에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발주처 기업의 제품을 사용했던 경험을 희화화해 이야기했다. 이를 들은 발주처 최고책임자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가버렸다. 그 이후 상황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프레젠테이션은 즉각 중단됐고, 해당 직원과 간부들은 최고책임자를 달래기 위해 빌고 또 빌어야 했다.

유머를 했는데 아무도 웃지 않는 어색하고 싸늘한 상황이 연출되면 분위기를 반전시키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을 웃기는데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원래 하려던 이야기를 충실하게 하는 게 더 낫다.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의 유머 구사능력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한편 듣는 이들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직업을 갖고 있으며 어떤 특성을 지녔는지 이해해야 불안감도 줄어들고, 유머도 어떻게 구사해야 효과적인지 가늠할 수 있다.

○ 부담 떨쳐내야

김은성 KBS 아나운서는 “뉴스를 들은 후 그 내용을 완성된 문장으로 옆사람에게 설명하는 연습을 하면 유창하게 말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김은성 아나운서 제공

말하기에 부담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다. 말하기의 고수로 불리는 유명 강사들도 강연을 앞두고 어느 정도 긴장하게 된다고 털어놓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계속 연습한다는 것. 적절한 긴장감이 성공적인 말하기를 위한 동력이 되는 셈이다.

김은성 아나운서는 “명연설가로 꼽히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발표불안증이 있었고, 윈스턴 처칠 총리는 말더듬이였지만 모두 자신의 의지로 극복했다”고 말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재능을 타고났다기보다는 꾸준하게 노력한 사례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김 아나운서는 “말하기 능력을 단기간에 드라마틱하게 향상시켜야 한다는 조급함부터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I have a voice!(나도 말할 권리가 있다고!)”

영화 속에서 조지 6세는 이렇게 외친다. 자신을 짓눌렀던 왕위의 무게감과 왕가의 규율에 따른 억압감(철제 부목을 대 안짱다리를 펴고, 왼손잡이였지만 품위가 없다는 이유로 오른손을 써야 했다)을 떨쳐낸 후에야 조지 6세는 비로소 말 더듬증을 극복한다.

말하기를 잘 하려면 먼저 말하기가 주는 부담감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스스로를 가만히 들여다 볼때 비로소 나만의 ‘스피치’를 시작할 수 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