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량 반 잔인 그녀에게 소주가 말을 걸었다… “늘 처음처럼 살아”
손혜원 대표는 17일 인터뷰를 하면서 “최근 몇 년 동안 나전칠기나 우리 전통공예에 관한 것이 아니면 인터뷰를 하지 않았는데…”라며 웃었다. 그러나 기자의 관심은 ‘처음처럼’에 숨어 있는 말이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소주를 들이키는 ‘학삐리’들은 말이 없었다. 몸을 비운 소주병도 말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하긴 소주는 원래 말이 없었다. 늘 우리 곁에서 기쁨, 슬픔, 분노, 좌절을 함께 나누지만 그냥 침묵할 뿐 말을 하는 법은 없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소주가 우리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얼마 전 ‘출시 5년 만에 18억 병이 팔렸다’는 ‘처음처럼’이 바로 그놈이다. 진로나 ‘참이슬’이나 ‘山’은 그냥 이름일 뿐이었지만, 이놈은 우리에게 “처음처럼…”하고 속삭이기도 하고, 때로는 “처음을 잊지 말라”고 야단도 치는 화자(話者)의 이름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태어났다.
자기 이야기를 가진 술은 많다. 특히 유서 깊은 위스키나 와인, 코냑일수록…. 아니, 모든 술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화자’가 되어 말을 걸어오는 술은 본 적이 없다.
손 대표는 참나무통 맑은 소주, 참이슬, 미(米)소주, 山, 화요(火堯)를 작명했다. ‘처음처럼’은 그녀의 6번째 소주 브랜드 작업이었다.
17일 서울 남산 자락의 사무실에서 마주 앉자마자 “소주 반잔이 주량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소주가 말을 걸어오도록 만들었는지 신기하다”고 했더니, 그녀는 “진짜 재밌다”며 오히려 기자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정말 그럴 생각으로 이름을 만들었다는 뜻입니까.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어땠을 것 같아요?”
“‘처음처럼’은 굉장히 전략적인 브랜드로 내놓은 겁니다. 2주일 만에 ‘발견’한 이름이지만 그동안 소주 브랜드를 해온 걸 생각하면 꽤 긴 세월입니다. ‘그린 소주’가 있었는데 ‘참나무통 맑은 소주’에 밀려 고전하다 ‘참이슬’에 KO패 했습니다. ‘참나무통’이나 ‘참이슬’은 내가 만든 브랜드인데, 다름 아닌 내 손으로 ‘참이슬’을 깨야 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그림 하나, 상형문자 하나로 ‘山’을 만들었는데 괜찮았습니다. 그런데도 ‘山’이 ‘참이슬’의 아류로 보였습니다. 패러다임 자체를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버려야 할 게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자연과 관련된 이름이었습니다. 결국 인간밖에, 인간에 대한 철학적 접근밖에 없었습니다.”
―평소 휴대전화 초기화면에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의 ‘처음처럼’ 글씨를 띄워놓고 있었던 게 결정적 계기였다고 하던데….
“맞습니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계기는 삼일제약의 새해 달력이었습니다. 2006년 1월 2일이었습니다. 직원들은 모두 쉬는 날이었지만 저는 사무실에 나왔습니다. 다음 날이 새 소주 브랜드 프레젠테이션 날이었거든요.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로 삼일제약 달력을 만들어 줬는데 새 달력이 내 책상에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1월 달력이 바로 ‘처음처럼’이었어요. 그걸 보는 순간 ‘아 저걸로 그냥 소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신영복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죠. 선생님도 ‘아무나 다 쓰는 말인데 그냥 쓰세요’라고 하시더군요. 사실 선생님은 무기형을 받고 난 뒤 하루하루가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감옥에서 매우 위로가 됐다고…. 김 기자님 말씀처럼 소주는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 모두에게 말을 걸 수 있습니다. 부자에겐 ‘자만하지 말라’, 가난한 사람에겐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고…. 재벌 회장이나 노숙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 그런 술은 소주밖에 없습니다.”
‘처음처럼’은 누구나 쓰는 말이지만, 소주 이름으로 사용된 ‘처음처럼’은 신 교수가 감옥에서 쓴 글씨다. ‘처음처럼-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의 바로 그 ‘처음처럼’이다. 신 교수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을 복역한 뒤 1988년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출간했다.
“그렇죠. 소주가 때로는 위로의 말을, 때로는 야단치는 말을 하는 것으로 느꼈다면 (이름을) 만든 사람의 의도가 성공한거죠.”
―처음 얘기를 나눌 때 농담처럼 ‘강남 좌파’라고 하던데 혹시 신영복 교수의 영향 때문입니까.
“그건 농담이고 저는 부르주아입니다. 운동을 해 본 적도 없고…. 다만 멘터가 세 분 계신데 신 선생님과 임영수 목사님, 그리고 김종인 전 의원입니다. 세 분은 연세도 비슷하시고 저에게 항상 밝은 눈을 주시는 분들이죠. 신 선생님을 통해 인문학의 힘을 알게 됐고, 세상에 대한 따듯한 시선, 이성과 감성의 균형, 약자나 아픈 사람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임 목사님도 꼭 같습니다.”(1988년부터 1997년까지 영락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임 목사는 경기 양평에서 ‘모새골’이라는 영성 훈련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모새골이라는 이름도 그녀가 지은 것이다)
―신 교수의 ‘처음처럼’이라는 책을 사 봤는데, ‘가장 먼 여행’이라는 잠언(箴言)이 와 닿았습니다. ‘인생의 가장 먼 여행은/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냉철한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이 그만큼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이 있습니다/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발은 실천입니다/현장이며 숲입니다.’ 손 대표의 여행은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저는 선생님처럼 학식이나 내공이 깊지 못해서 그냥 머리에서 가슴으로 왔다 갔다 할 뿐입니다. 다만, 참 표현하기 어려운데 남한테 베풀면서 기쁨을 얻는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보다 디자인도 잘하고, 지식도 더 가진 사람이 많겠지만 저는 제 무게중심을 온전히 상대에게 쏟아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게 오늘의 저를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하면 행동합니다.”
―요즘은 중소기업과 지방자치단체의 브랜드 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하고, 전통 나전칠기의 세계화에도 빠져 있다고 하던데, 뭐랄까 히트 디자이너를 넘어서는 ‘자아의 확대’라고 할까,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을 꿈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글쎄요. 돈이 있고 여유가 있으니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죠. 다만 제 이름을 팔아서 나전이나 한국 공예의 가치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제 인생의 마지막은 우리나라 공예를 위해 사는 겁니다.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300점의 나전칠기를 수집했는데 그중 정수만 골라 멋지게 전시하고 책도 낸 다음 민속박물관 같은 곳에 전부 기증할 겁니다.” 그녀는 지난 5년 동안 인간문화재이자 나전칠기의 ‘중시조’라 할 수 있는 일사 김봉룡(一沙 金奉龍·1902∼1994) 선생의 작품을 비롯해 우리 나전칠기 작품 수집에 30억 원을 쏟아 부었다. 브랜드 마케팅으로 번 돈 전부다.
―말이 난 김에 혹시 대한민국의 브랜드 리뉴얼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예컨대 진로(眞露)에서 ‘참이슬’을 끄집어냈듯이 브랜드 디자인은 늘 ‘브랜드의 현존 가치, 본질 가치를 더욱 높이기 위한 전략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던데….
“저는 그 질문이 너무 좋습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분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한국 사람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한국 사람들만 모르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정수일 교수(무함마드 깐수·전 단국대 교수)한테 들은 얘긴데, 오늘날 한국이 잘살게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전에 잘살아 본 나라만이 잘살 수 있다는 거죠. 페르시아의 구슬이 고려 여인의 손에 들어오는 데 8개월밖에 안 걸렸다는 겁니다. 일제강점으로 한국의 가치가 단절됐지만 조선시대의 가구를 보면 그 심미감이나 여유로움은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또 임금이 문자를 만들고, 어떻게 사용해야 한다는 해설서(훈민정음 해례)까지 편찬한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나전, 한지, 한복은 또 어떻고…. 저는 작년 여름 내내 모시만 입고 다녔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를 리뉴얼하려면 잘못 끼워진 단추부터 바로 채워야 합니다. 정보기술(IT), 휴대전화, 가전제품도 위대하지만 그런 건 다른 나라들도 금방금방 따라옵니다. 우리 선조들이 남겨준 위대한 현존가치부터 살려야 합니다.”
전통공예 얘기가 나오자 그녀의 말이 장황해졌다. 70세쯤 됐을 때 한국의 브랜드를 세운 사람, 한국의 가치를 세계화시킨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말에서 멈췄다.
신영복 교수는 자유(自由)에 대해 이렇게 썼다. ‘자유는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처음처럼’이 우리에게 걸어오는 말은 바로 이 말 아닐까? 손 대표는 굳이 ‘처음처럼’을 마시지 않아도 자유를 아는 것 같았다. 부러웠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아파트 김치 음료 등 귀익은 이름 수두룩 브랜드 작명 분야선 ‘미다스의 손’ 불려▼
손 대표가 브랜드 디자인한 제품들.
5년 전부터는 나전칠기를 비롯한 한국공예에 빠져 서울 남산 사무실 옆 남산체육관에 230m² 정도의 공간을 임대해 나전과 공예품을 전시해 놓고 있다.
―1955년생·홍익대 응용미술학과
―1977년 현대양행 기획실 디자이너
―1986년 브랜드 디자인 전문회사 크로스포인트 창립
―1998∼2008년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교수
―2004년 ‘콩두’ BI로 홍콩디자인센터 주최 ‘아시안디자인어워드’ 수상
―2010년 한국스타일박람회(Korea, the Style) 예술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