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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김창원]‘양날의 칼’ 원자력에 베인 그들

입력 | 2011-03-28 03:00:00

김창원 도쿄특파원


후쿠시마(福島) 제1원자력발전소(원전) 폭발 이후 없던 버릇이 생겼다. 24시간 내내 TV를 끄지 못하고, 잠들기 전 머리맡의 지갑과 여권을 몇 번씩 더듬어 확인한다. 마실 물은 충분한지 수시로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언제 방사성 물질이 도쿄 하늘을 덮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일도 잦아졌다. 지진해일(쓰나미)로 원자로 4개가 잇따라 폭발한 후쿠시마 원전사태는 200여 km나 떨어진 도쿄 거주자의 생활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보도하면서 문득 과거에 썼던 기사들이 떠올랐다. 예전에 한국에서 썼던 원전 관련 기사다. 당시 한국 원전의 우수성과 안전성을 소개한 기사들이다.

‘일본과 같은 대지진이 동해 앞바다에서 일어났다면…’이라는 끔찍한 가정을 해봤다. 한국의 원전은 후쿠시마 원전보다 최신 설계기술을 채택했기에 비교적 안전하다는 게 한국 원전 전문가들의 견해다. 한국은 일본처럼 지진이 많지 않은 데다 규모 6.0의 지진이 원전 바로 밑에서 발생할 것을 대비해 설계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지켜보면서 마음이 늘 편치 않다. 일본 역시 원전 기술이나 안전성 면에서 한국에 뒤지지 않는 나라다. 일본인의 철저한 장인정신과 빈틈없는 사전준비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나라에서도 첨단기술의 총아라는 원전은 일순간 치명적 무기가 돼버렸다.

“10m가 넘는 거대한 물기둥이 삽시간에 원전을 덮쳤다. 지진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흔들림은 상상조차 못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후쿠시마 원전의 한 직원은 쓰나미에 힘없이 쓰러진 원전의 모습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또 다른 원전 기술자는 “원전은 안전하다고 주장해 온 나도 지금 복잡한 심경”이라고 했다.

원전의 위험성 때문에 원전을 포기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볼 일이 있다. ‘문명화되고 풍요로워질수록 전기수요는 늘 수밖에 없으며 값싼 전기를 제공해주는 원전 건설을 늘려야 한다’는 당위론적 전제다. 원전은 석탄이나 석유를 원료로 쓰는 화력발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제성을 지녔고 온실가스 배출을 줄일 수 있는 클린에너지라는 점에서 포기하기 힘든 대안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원전이라는 ‘든든한 백’만 믿은 채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에 대한 욕구를 아무런 억제 없이 키워온 것은 아닐까. 그 든든한 백은 순식간에 치명적 칼이 될 수 있음을 이번 사고는 보여줬다. 보름 넘게 후쿠시마 원전사태가 이어지면서 풍요로웠던 도쿄는 한순간에 불편한 도시로 변했다. 후쿠시마 원전이 가동을 멈춰 전력 공급이 달리자 도쿄 등 수도권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전력을 시간제로 배급하는 ‘계획정전’을 실시하고 있다. 거리를 환하게 비추던 가로등이 꺼졌고 도심의 고층빌딩도 엘리베이터 가동과 난방을 대폭 줄였다. 밤낮으로 불을 밝히고 영업하던 편의점은 네온사인을 껐고 24시간 영업하던 햄버거집도 오후 9시엔 문을 닫는다. 온종일 따뜻이 데워져 있던 사무실의 화장실 변기조차 차가워졌다.

있던 게 갑자기 사라지는 데서 오는 상실감은 작지 않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보름 가까이 이어지니 견딜 만하다. 없으면 고통스러울 것만 같던 ‘문명의 이기’에 너무 익숙해 있었다. 진작부터 안락하고 편해지려는 욕구를 덜어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았을까. 매일 아침 습관처럼 올라타던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도 멈췄다. 팍팍해진 다리를 두드리며 계단을 걸어 오르자 오늘따라 하늘이 눈부시게 파랗다. 파란 하늘이 서럽도록 고마웠다.

김창원 도쿄특파원 chang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