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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시시콜콜한 일상사가 이렇게 낯설다니…

입력 | 2011-03-29 03:00:00

일본극단 첼피치 연극 ‘핫페퍼, 에어컨 그리고 고별사’
연출★★★★ 연기★★★★ 대본★★★★ 음악★★★☆




직장 내 비정규직 차별 문제를 리듬감 가득한 무대화법으로 담아낸 일본 극단 첼피치의 ‘핫페퍼, 에어컨 그리고 고별사’. 2년 가까이 다니던 직장을 갑자기 그만두게 된 비 정규직 여사원이 독특한 동작을 반복하면서 언중유골이 담긴 중언부언의 고별사를 토해내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공연을 보고 난 뒤 관객들은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이율배반적 반응에 당황한다. 몸은 1시간 공연 내내 배우들이 반복을 거듭하던 동작을 따라 하지 못해 안달을 부린다. 마음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누는 21세기적 인간차별 앞에 침묵하던 자신의 비겁함을 되새김질하기 바쁘다. 경쾌한 몸의 반응에 계면쩍은 미소를 짓다가도, 묵직한 마음의 반향을 따라 어느새 침묵에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매력을 이 작품은 지녔다.

24∼26일 서울 용산구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된 일본 극단 첼피치의 ‘핫페퍼, 에어컨 그리고 고별사’는 확실히 독창적인 무대 화법을 선보였다. 각각 20분씩 3개 에피소드로 구성된 연극은 음악극과 무용극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비정규직의 애환을 실감 있게 묘파했다.

1장 ‘핫페퍼’는 비정규직 여직원이 그만두게 된 상황에서 송별회 준비를 떠맡은 비정규직 직원들이 음식점에 대한 잡다한 정보를 담은 잡지 ‘홋토 펫파’(일본식 발음)를 뒤적이며 음식점을 물색하는 내용이다. 2장 ‘에어컨’은 추위에 민감한 정규직 여사원이 일방적으로 에어컨 온도를 낮추는 남자사원 때문에 힘들어하는 대화를 펼친다. 3장 ‘고별사’는 2년이 안 돼 사직을 강권당한 비정규직 여사원이 1, 2장에 등장한 동료들 앞에서 조금은 썰렁한 고별사를 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장면만 놓고 보면 그저 뻔한 이야기일 듯하다. 하지만 극작과 연출을 맡은 오카다 도시키 씨(38)는 콘텐츠가 아니라 스타일로 관객의 의표를 찌른다. 각 장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뮤지컬 배우처럼 헤드셋 마이크를 장착하고 등장해 같은 말을 앵무새 수준으로 되뇐다. 그러면서 개별 인물별로 대화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과장된 동작을 계속 반복한다. 이 동작의 반복이 배경음악에 맞춰 이뤄지다 보니 차라리 춤에 가깝다.

조리에 맞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공연에 익숙한 관객에게 이런 극적 장치는 처음엔 ‘낯설게 하기’ 효과가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모습이 더 현실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같은 소리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가. 또 남 이야기는 잘 안 들으면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지 않던가. 게다가 공연 속 대화 내용도 일상의 대화를 거의 그대로 따왔다는 느낌이 들 만큼 시시콜콜한 게 디테일마저 사실적이다. 오카다의 연극을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부르는 이유다.

반복은 웃음을 낳는다. 배우들이 같은 말과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게 처음엔 어색하다가 우스꽝스럽게 다가서는 이유다. 하지만 내용이 완전히 똑같지 않다. 변죽을 울리는 소리만 되풀이하다가 불쑥 본심을 끼워 넣는다. 그런데 이게 더 짠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동료의 송별회를 준비하던 비정규직 사원들이 “내 송별회도 얼마 안 남았을 텐데…”라며 각자 송별회 식당을 미리 지정해 놓는 장면이 그렇다. 의례적 인사치레로 송별사를 늘어놓던 비정규직 여사원이 출근길 하이힐에 밟혀 죽은 매미 이야기를 불쑥 꺼낼 때도 그렇다. 그러면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이를 대신해 꼭 한 분에게 감사드리고 싶다”면서 직장에서 도시락을 설거지할 때 세제를 양보해준 정규직 사원을 꼭 찍어서 “그것도 코코넛으로 만든 친환경 세제였는데”라며 감사를 표할 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 이처럼 ‘쿨’하게 접근하면서 ‘핫’하게 마음을 뺏는 공연이 과연 얼마나 될까.

독일 연출가 르네 폴라슈의 ‘현혹의 사회적 맥락이여,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가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방사선 피폭을 우려한 독일 스태프들의 방한 거부로 취소되면서 이 작품은 ‘페스티벌 봄’의 사실상 개막작이 됐다. 거창한 제목과 안 어울리게 소심한 행동으로 한국 관객을 실망시킨 독일 거장의 작품이 아니라 일상에서 감동을 끌어낼 줄 아는 일본 젊은 작가의 공연이 개막작이 된 것 자체가 이미 의미심장한 퍼포먼스처럼 다가왔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