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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情人의 약속

입력 | 2011-04-03 20:00:00


김순덕 논설위원

왜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상처를 줄까. 부지런한 캐나다의 사회심리학자 라라 캠래스가 연구를 해봤다. 실제로 가장 긍정적 감정을 느끼는 관계, 상대의 요구를 잘 아는 사람이 거창한 약속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는 분명 진심이었지만 세상일이 그렇듯 피치 못할 사정은 늘 생겨난다. 그래서 “약속과 계란껍질은 깨지라고 있다”며 변명하고 다툼 끝에 또 약속을 하곤 한다.

정치인과 유권자는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어도 감정으로 얽힌 관계다. 투표와 결혼과 내 집 장만은 감정에 휘둘려 저지르는 일이 적지않다. 이명박 대통령(이하 MB)의 동남권 신공항 공약도 좋게 보면 영남 유권자의 요구를 잘 알기 때문에 내놓은 약속이고, 달리 보면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이 분명하다.

신공항 백지화가 발표되자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이하 박근혜)가 “국민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라 유감스럽다”고 사실상 MB를 겨냥해 말했다. MB는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깝고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국민에게 사과했다. 현재까지의 결과만 본다면 MB는 약속을 깬 정치인이고, 박근혜는 세종시에 이어 연거푸 신뢰의 브랜드를 굳히게 됐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여론과 평가는 단순하지 않다. 부지런한 외국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정치인의 일관성이 항상 좋은 평가를 받는 건 아니라는 거다.

미국 대선을 앞둔 2007년 민주당 전초전에서 버락 오바마는 초지일관 이라크전에 반대했다는 점에서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이라크 침공에 찬성했다가 “상황이 바뀌었다”며 반대로 돌아선 힐러리 클린턴도 크게 비난받지 않았다. 오히려 이라크전의 잘못을 일관성 있게 부인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더 나쁘다.

“내 뜻과 맞으면 일관성 깨도 좋아”

사람 심리가 그래서 희한하다. 유권자들은 정치인이 약속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말을 바꿨느냐 아니냐에 큰 관심이 없다. “중요 정책에 대한 그 사람의 현재 입장이 내 의견과 같으면 믿을 수 있는 정치인이고 아니면 못 믿을 정치인이라고 본다”는 게 미국 마이애미대 힐러리 호프먼 심리학 교수의 연구결과다.

더구나 보통사람들은 정책 내용과 파장을 깊이 알지 못하고 자신이 선호하는 정치인의 정책판단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그 선호하는 정치인은 가만 보면 자기와 가치관이나 이해관계가 대체로 비슷하다. 현실주의자는 현실주의적 리더가, 이상주의자는 이상주의적 리더가 옳다고 보는 식이다.

그러니 MB와 박근혜에 대한 평가도 사람마다, 지역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경제성을 이유로 동남권 신공항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사람들은 MB의 공약 파기를 대통령다운 결단으로 평가하는 반면, 정치인의 신뢰나 지역발전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공약 수호를 외치는 박근혜 편이다.

세종시 논란도 비슷했다. MB는 세종시를 반쪽 행정수도보다 교육과학중심도시로 만드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해 수정안을 내놨다. 반면 박근혜는 “약속을 어기는 것으로 생기는 손실에 비하면 세종시 수정안으로 인한 행정 비효율은 훨씬 작을 것”이라며 수정안 반대를 이끌어냈다.

지금도 MB 판단이 옳았다고 믿는 사람들은 내년 정부기관 이전이 본격화되면 시작될 재앙을 걱정하고 있다. 현실적 실용적 논리적 성향을 지녔다는 점에서 MB와 닮은꼴 사람들이 그쪽이다. 이들에게는 박근혜의 원칙 고수가 융통성 없는 독선이나 다름없다. 거꾸로 박근혜가 옳다고 믿는 사람들은 경제성만 따지는 ‘MB족’을 속물로 본다. 지역주민의 절절한 정서와, 균형발전이라는 이상이 걸린 사안을 뒤집어선 안 된다고 여기는 점에서 이들은 박근혜와 성향이 흡사하다.

결국 MB와 박근혜의 불일치는 가치관의 충돌이다. 어떤 리더, 어떤 공약을 선택했는지도 각자가 지닌 가치의 반영이었다. 어떤 가치만이 옳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약속을 깨는 게 옳은가 그른가를 가리는 것도 쉽진 않다. “결과만 좋으면 대통령의 거짓말도, 공약(空約)도 괜찮게 평가된다”는 게 ‘리더는 왜 거짓말을 하나’라는 책을 쓴 미 시카고대의 존 미어샤이머 정치학 교수의 분석이다. 세종시나 신공항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측은 가능해도 누가 확실히 알 수 있겠나.

남의 세금으로 함부로 공약 말라

지금 문제를 키우는 사람은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마찰 속에서 고민하는 정치꾼들인 것 같다. 어느 줄에 서야 다음 선거에 유리할지 계산이 복잡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국정에 정력을 쏟는 게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길이다. 과학벨트 선정이나 ‘MB정부 성공과 정권 재창출 협조 약속’을 놓고서도 가치 논쟁, 이념 전쟁으로 확대시킬까 겁난다.

“내 사랑을 알아달라”며 외치고 다니는 정치인들에게 한 가지만 부탁하고 싶다. 제발 돈 들어가는 약속은 함부로 하지 말기 바란다. 그 대신 ‘부패 척결’처럼, 정치판의 의지만 있으면 지킬 수 있는 공약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당신들의 애정을 믿을 수 있겠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