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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눈/모린 다우드]밥 딜런의 中공연이 나쁜 이유

입력 | 2011-04-12 03:00:00


모린 다우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1960년대 자유찬가를 부르던 쉰 목소리의 음유시인이 독재국가에 가서 자유찬가를 노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는 새로운 형태의 판매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카다피 일가를 위해 노래하고 수백만 달러를 챙긴 비욘세, 머라이어 캐리와 어셔, 러시 림보(보수파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의 네 번째 결혼식에서 동성애자 혐오에 관한 노래를 불러 돈을 긁어모은 엘턴 존보다 더 나쁘다.

지난주 수요일 중국 베이징 노동자체육관에서 열린 첫 중국 콘서트에 앞서 밥 딜런은 중국 정부가 자신의 노래를 사전 검열하는 걸 받아들였다. ‘시간은 바뀌고 있다(The Times They are A-Changin')’나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과 같은 그의 상징적인 혁명 노래들은 청중 속에 자리 잡고 앉은 2000명의 중국 기관원들을 위해서는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동을 휩쓴 민주화 열풍에 겁먹은 중국은 예술가, 변호사, 작가, 반정부인사들을 강경 진압해오고 있다. 인터넷 검열을 하고, 비밀경찰을 동원해 베이징 올림픽스타디움을 설계한 아이웨이웨이를 체포했다.

밥 딜런은 아이웨이웨이의 체포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저지르지도 않은 일 때문에 권력의 비난을 받았던 사람이죠”라는 그의 노래 ‘허리케인’의 후렴구도 부르지 않았다. 그는 검열에 통과된 부분만 노래했고, 공산당의 현금 다발을 갖고 중국을 떠났다.

22세 때 밥 딜런은 CBS의 ‘에드 설리번 쇼’에서 뛰쳐나갔다. 검열단이 그에게 ‘존 버치의 편집증적인 블루스에 관한 이야기’를 부르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정치·예술 잡지 ‘뉴 리퍼블릭’의 평론가 데이비드 하주는 “밥 딜런이 항상 지도자가 되고 싶지 않은 것과 유명 인사가 되고 싶은 것 사이에서 갈등을 보여 왔다”고 말했다. 밥 딜런은 “나는 결코 나 자신이 포크가수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밥 딜런은 정말로 1960년대 정신을 배반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그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고록 ‘연대기’에서 그는 반체제를 이끄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고자 했던 적이 없다고 말했다. 또 그를 향한 미신적 숭배들이 그의 영혼을 가두고, 그를 메스껍게 만들었다고 적었다. 그는 “나는 아주 조금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목소리가 되고자 했던 세대들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하얀 담장으로 둘러싸인 분홍색 장미가 뜰에 피어있는 이스트햄프턴(미국 버지니아 주의 도시)의 집에 살면서 아내, 아이들과 함께 시리얼을 먹으며 프랭크 시내트라 주니어의 공연을 보기를 원했다고 썼다. “반체제가 무엇이든지 나는 충분히 그것을 보아왔다”며 혁명 세력의 큰형, 시위대의 고위 성직자, 반체제의 차르로서 추앙받는 것을 불평했다. 정치적 의미를 지닌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해 “썩어가는 무거운 고기를 운반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도 적었다.

하주는 내게 밥 딜런이 그의 반항적 노래들로부터 멀어져갔다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하주는 “아마 그의 작품 속에서 나타난 일종의 출세제일주의를 깨달아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주는 밥 딜런이 지금 프랭크 시내트라와 같이 구식 순회공연 전문 가수가 됐다고 말했다. 밥 딜런은 1963년도라는 젤리에 갇혀 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청바지에 작업복을 입고 ‘전쟁의 달인들’을 부르던 남자가 아니다.

밥 딜런은 아마 그의 노래의 몇몇 가사를 다시 써야 할 것이다.

“난 당신이 발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죽음이 당신에게 다가올 때/당신이 번 모든 돈이/ 당신의 영혼을 결코 되살 수 없다.”

모린 다우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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