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기발한 VOD 제목들

입력 | 2011-04-12 03:00:00

살 흰애 추억… 선녀와 나 후끈… 에로팍도사…
에로영화, 고객 낚는 제목종결자




《어느 날 집에서 디지털케이블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깜짝 놀랐다. 주문형비디오(VOD·원하는 영화를 선택하면 편당 관람료를 내고 해당 비디오를 곧바로 볼 수 있는 서비스)의 ‘성인영화’ 항목에 들어가 보았더니 300편이 넘게 검색되는 게 아닌가. 제목들을 살펴보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목이 어찌도 이리 창의적이란 말인가!》

하긴, ‘젖소부인’ 시리즈로 대변되는 국내 에로비디오 시장은 인터넷 ‘야동(야한 동영상)’에 밀려 위축된 지 오래. 결국 성인영화들은 디지털케이블 업체들이 제공하는 VOD 서비스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게 된다. 일단 제목에서 고객을 ‘낚아야’ 생존할 터이니, 기발한 제목 짓기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으리!

자, 지금부터 내 머릿속에 각인된 기발한 에로영화 제목들을 소개한다. 아! 역시 한민족의 핏줄엔 창조의 DNA가 면면히 흐르고 있구나!

①패러디형=유명 영화나 드라마 제목을 따와 재치 있게 비튼 유형이다.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를 패러디한 ‘섹스왕 김빵꾸’나 ‘섹스왕 김탁탁’이 여기에 속한다. TV 리얼리티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나온 ‘우리 속결합했어요’나 고발프로 ‘불만제로’에서 태동한 ‘풍만제로’도 이런 유형. ‘에로팍도사’(←무릎팍도사)나 ‘올누드보이’(←올드보이), ‘거기숲’(←거미숲)은 다소 유치한 수준. 영화 ‘목포는 항구다’를 비튼 ‘목표는 형부다’나 ‘살인의 추억’에서 나온 ‘살흰애 추억’도 있다. ‘솔로천국 커플지옥’이라는 한 코미디 프로 속 슬로건에서 태동한 ‘애무천국 불감지옥’은 재치가 있는 편. 그중 백미는 ‘선녀와 나무꾼’을 원용한 ‘선녀와 나 후끈’과 히트 영화 ‘해운대’를 살짝 비튼 ‘해준대’, ‘허준’에서 나온 ‘헉!준’이 되겠다.

최악의 제목은 ‘생활의 달인’에서 나온 ‘생활섹스의 달인’. ‘행사섹스의 달인’이 존재하지 않는 한 이 제목은 어불성설이다. 또 ‘시크릿 가든 섹스’나 ‘사회지도층의 섹스’는 뜨는 드라마에 무임승차하려는 매우 안일한 제목.

②트렌드형=최신 유행을 제목에 발 빠르게 반영한 경우다. ‘어떤 분야에서 최고 경지에 이른 사람’을 일컬어 ‘종결자’라 부르는 유행에 착안한 ‘사모님은 하체 종결자’가 이에 속한다. 우후죽순 생겨나는 서바이벌 프로의 영향을 받은 ‘제 키스에 점수를 주세요’도 있다. 농촌총각들의 국제결혼 현상에 맞춘 ‘농촌총각의 글로벌 속궁합’, 최근 뜨는 직업으로 바리스타(커피 만드는 전문가)가 선호됨에 따른 ‘꽉꽉 무는 바리스타’, 도시성과 ‘쿨’함을 강조하는 젊은 트렌드를 감안한 디테일한 제목 ‘오피스 506호 아가씨의 체취’도 눈길이 간다. ‘연변처녀의 복수’도 아시아 속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실감케 하는 제목이다.

③변태형=직설적이고 변태적인 제목으로 일단 눈길을 잡고 보는 유형으로, ‘마누라의 발냄새’와 ‘청소 중인 마누라’가 이에 속한다. ‘발가락 섹시한 잠자는 공주’나 ‘멍게 잡는 아저씨’는 뭔가 변태적일 것 같은데 메시지가 한 번에 팍 꽂히질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아줌마 육탄돌격대’는 직설적이지만 상상력과 감성이 다소 부족하고, ‘문밖의 남자는 형부’는 시적 감성이 돋보이나 어딘지 싱겁고 헐렁하게 느껴진다. 최신 트렌드를 반영해 ‘문밖의 남자는 대기업 상무’ 정도가 어떨까?

이 밖에 매우 실망스러운 제목도 있었다. ‘미녀와 세차’ ‘앙칼진 아줌마’ ‘몸살 난 사모님’ ‘하녀로 변한 과외선생’은 고전적이다 못해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경우들. 특히 ‘노인과 연못’은 ‘노인’과 ‘연못’이라는 가장 장사가 안 되는 두 단어를 갖다 붙임으로써 시너지 효과는커녕 본전도 못 찾은 경우다. ‘망사스타킹 마니아’나 ‘가터벨트 섹시녀의 유혹’도 기능성 속옷이 넘쳐나는 첨단시대를 읽지 못한 현실 안주. ‘총각, 필요한 거 없어?’는 여백의 미가 깃든 제목이지만, 총각이 필요한 게 없을 경우는 스토리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