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영재들이 거목으로 자랄 기회, 스스로 꺾고 있는 건 아닌지…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친구는 자신이 맡고 있는 학생들과 어떻게 관계해야 할지 고뇌하고 있었다. 새로 담임으로 부임하자마자 그는 성적으로 서열을 매기는 학급 분위기를 일소하려고 하였다. 어차피 일등에서부터 꼴등까지 정해지는 성적 경쟁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한두 명의 학생을 제외하고는 모든 학생이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친구는 학창시절의 열등감이 얼마나 집요하게 평생을 따라다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위험한 줄타기를 시작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만큼이나 글을 잘 쓰는 학생, 운동을 잘하는 학생, 그리고 노래와 춤에 능숙한 학생들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내 친구는 모두가 자신의 일에서 일등일 수 있다는 자부심을 키워주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물론 학급 분위기는 어느새 생기를 되찾았다. 그러던 중 예기치 않은 일이 그에게 일어나게 된다. 반에서 일등을 독차지했으며 전교에서도 항상 1, 2등을 다투던 아이가 어느 날 면담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 아이는 다짜고짜 전학을 요구했다. 부모님과의 상의는 모두 끝났다고 하면서.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친구는 그 아이가 학교생활에 어떤 불편함이 있었는지 알아보려고 노력했다. 제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친구는 전학을 결정한 진정한 이유를 알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제자와 그의 부모가 전학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바로 자신 때문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성적만으로 인정을 받아왔던 제자와 그의 가족들은 내 친구의 개혁 조치가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제자는 지금까지 자기보다 공부를 못하던 동료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인정받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로 인정의 서열이 결정되는 학교로 전학하려고 결정한 것이다. KAIST 학생들의 연이은 자살 기사를 접하면서 나는 자기의 동료들이 나름대로의 능력에 따라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견디지 못했던 내 친구의 제자의 일화가 떠올랐다.
그렇지만 아무리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스무 살이 넘은 성인이기도 하다. 성적을 유일한 인정 수단으로 강제하는 외적인 힘에 대해 저항하지 않았던 책임, 이것은 분명 KAIST 학생들이 떠맡아야 할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의 주체가 기성세대이고 대상이 학생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당당하게 성적제일주의로 몰고 가는 기성세대에 저항했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의 반 타의 반 성적제일주의를 수용했던 것 아닐까?
인정이 선행한다는 사실과 양립할 수 없는 사고 도식과 편견들에 의해 우리가 영향을 받는다는 이유에서도 그런 사실에 대한 주의는 상실될 수 있다. 이런 한에서 이 경우에는 ‘망각’이 아니라 ‘부정’ 혹은 ‘방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수도 있겠다. ―‘물화: 인정이론적 탐구(Verdinglichung: Eine anerkennungstheoretische Studie)’
한때 교육과학부로 통폐합되기 전 교육부가 교육인적자원부로 불렸던 적이 있다. 각 개인을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할 인격체로 보지 않고 하나의 자원으로 보는 발상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 자살한 KAIST 학생들이 어떻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지성의 힘과 인문학적 열정으로 저항하기 힘들다면, 나는 우리 학생들이 장자의 지혜를 다시 한 번 숙고해 보기를 간절히 바란다.
머리를 들어 나무의 가는 가지들을 보니 모두 꾸불꾸불하여 서까래나 기둥이 될 수가 없었다. 머리를 숙여 나무의 등걸을 보니 속이 텅 비어 관을 만들 재목이 될 수가 없었다. 잎을 씹어 보니 입이 얼얼해지고 상처가 났다. 나무의 냄새를 맡아 보니 사람을 심하게 취하도록 하여 사흘이나 깨어나지 않게 하였다. 남백자기는 말했다. 이것은 과연 ‘재목으로 쓸 수 없는 나무(不材之木☆☆)’여서 이렇게 크게 자랄 수가 있었구나. ―‘장자(莊子)’
<강신주 철학자·‘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 삶을 만나다’ 저자>
경쟁(競爭·competition)☆
공존과 공감을 부르짖으면서도 아직도 우리는 경쟁을 통해 인간과 사회가 발전한다는 낡은 가치관을 신봉하고 있다. 경쟁은 자유로운 교류와 연대를 가로막고 인간을 고립화시키는 주범이다. 경쟁을 제도화했을 때, 경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참가자들은 실패의 책임을 자신이 떠안는 경향을 보인다. 자신이 조금만 노력했으면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부끄럽게도 우리가 자살률 1위를 자랑하는 것도 우리 사회가 경쟁을 지고한 가치로 숭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소통과 연결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는 경쟁이 가진 유용성이란 신화로부터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부재지목(不材之木)☆☆
곧지 않고 복잡하게 꼬여 아무런 쓸모도 없는 나무를 뜻하는 ‘산목(散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동시대 사상가들이 사회에 도움이 되느냐의 여부에 따라 개인의 가치를 평가하려고 했을 때, 장자만은 개인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고 긍정했던 철학자였다. 개체의 단독적인 삶을 강조했던 장자의 정신은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는 명령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 기성세대들이 깊이 새겨볼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