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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세상/이석영]우주 속의 나, 내 속의 우주

입력 | 2011-04-13 03:00:00

이석영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교수


나는 최근 중한 병에 걸렸다는 판정을 받고 그 전에 몰랐던 복잡한 삶의 모습을 보게 됐다. 의사가 내시경 검사를 너무 길게 한다 싶었다. 암이란다. 일주일 만에 일사천리로 수술을 하고 이젠 건강한 새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정말 웃긴다. 수술 들어갈 땐 살 수 있길 바랐는데 이젠 좋아하던 감자탕도 먹을 수 있게 될까 궁금하니.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고마운 사람들 얼굴이 아른거린다. 처음 병을 발견하고 제 일인 듯 치료해준 의사와 의료진, 일요일 밤 병문안도 끊길 시점에 병실을 찾아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더없이 자상한 행동으로 내 안위를 돌봐준 집도의, 상냥하게 환자를 위하는 간호사들, 평소 말 한마디 못 걸다가 병문안 와서 눈물을 흘리던 지인들, 이 모든 순간을 나보다 더 힘들어하던 아내와 식구들. 생각나는 대로 감사를 표시하려다가 문득 이전엔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됐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의 힘과 능력이 닿는 대로 행했다. 나는 의료진에게 특이했을망정 특별한 환자는 아니었고, 지인들에겐 평소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그분들에게 내가 되돌려줄 수 있는 것도 없었고, 그분들은 그냥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했는데, 내겐 잊을 수 없는 고마운 경험이 된 것이다.

화가 폴 고갱의 작품 ‘인간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주와 자연의 원칙을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있는 내게, 이 질문은 너무도 심오하게 다가온다.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가 기적과 같다. 쉽게 보면, 인간의 몸 대부분을 구성하는 물의 기본원소인 수소는 우주가 빅뱅 후 처음 몇 분 지날 동안 만들어진 것이고, 탄소 질소 산소 등 다른 모든 원소는 그 후 우주의 별들이 만든 것이다.

오늘의 내가 있기 위해선 어머니 지구에게 감사하고 기껏해야 태양에게 고마워하면 될 것 같지만 우리의 존재를 가능케 한 우주의 섭리는 훨씬 오묘하다. 지구에 우리가 태어나고 존재하기 위해 먼저 태양이 반드시 태어나야 했고, 태양계에 생명력이 있기 위해선 온갖 무거운 원소를 만드는 무거운 별들이 태양 이전에 존재해야 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되지 않는 몇 개의 초신성이 그들의 일생 마지막 순간에 자신들이 수천만 년을 통해 만든 진귀한 원소들을 우주에 환원한 거대한 행위 없이는 태양은 생명을 잉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별들의 탄생을 위해 우리 은하가 120억 년 전에 태어나야 했고, 우리 은하의 탄생을 위해 좀처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암흑물질은 조용히 온 우주의 은하 탄생의 요람을 마련했다. 암흑물질의 효과적인 역할 수행은 우주 태초에 시작한, 쓸모없어 보이는 잡음과 같은 미세한 밀도 차이가 보장했다.

나는 우주에 우리 말고 다른 외계 생명체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어떤 영화에선 “만일 우리뿐이라면 우주는 엄청난 공간의 낭비 아닐까?” 하고 호소력 있게 주장했다. 하지만 오로지 우리만이 광활한 우주에 유일하게 존재한다 하더라도 우주는 이 복잡한 과정을 모두 그리고 전 우주에 걸쳐 수행해야만 했다. 나 하나의 존재를 위해 실로 전 우주가 137억 년 동안 역할 분담을 해온 것이다.

캠퍼스를 가로질러 강의실에 갈 때면 아직 몸이 무겁고, 2시간 연강이라도 하려면 등줄기에 땀이 흐르지만, 내 강의를 눈 동그랗게 뜨고 숨죽여 들어주는 미래의 주인공들을 보면 내가 오늘도 내 역할을 했나 보다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빚을 내 역할을 하며 갚아야겠다. 행복하고 무겁다. 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을 보아서.

이석영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