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철학
그런데 한국인으로 기분 좋지 않은, 그러나 긍정할 수밖에 없는 통계가 나왔다. 나라별 친절도를 계량화했을 때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34개국 중 하위권인 21위란다. OECD ‘한눈에 보는 사회상’ 보고서의 내용이다. 한국, 한국인은 친절하지 않다! 그리고 신뢰도에서는 30개국 가운데 25위. 여기서는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이 강세였다.
통계로 본 한국, 한국인은 팍팍했다. 계량화의 오류라고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좋겠는데, 그보다는 우리를 드러내는 정직하고도 난감한 통계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우리가 생각해도 우리는 친절하지 않고, 나눔과 봉사에 인색한 것 같다. 사실 친절하지 않아도 된다. 배려할 줄 몰라도 삶은 계속된다. 그 누구도 친절과 나눔을 강요할 수는 없다. 강요된 선은 선이 아니므로. 때로 그것은 악보다 치졸한 것이므로. 그런데 궁금하기는 하다. 우리는 왜 친절하지 않고 배려할 줄 모르게 되었는지.
어려서부터 우리의 교육은 경쟁에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점수와 등급이 전부인 가난한 교육환경에서 성장했다. 우리는 놀며 사랑하며 배려하면서 문득문득 경쟁을 배운 게 아니라 비교하며 경쟁하는 데만 익숙했다. 지금 중산층 1세대는 자기 안의 열정을 깨우기보다 머슴으로 뽑혀 죽도록 일만 하는 것을 생의 보람으로 알고 살아온 세대다. 한강의 기적을 이뤄 낸 그 세대가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거칠고 이기적인 인간으로 성장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의 말이 생각난다. “대개의 사람들은 생활하고 있는 게 아니라 경쟁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들은 성급하게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하기 때문에 숨이 차서 헉헉거리다 아름다운 경치를 하나도 못 보지요. 그러고 나서 깨달은 것은 목적지에 도착하든 못하든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나는 길가에 주저앉아 작은 행복들을 산처럼 주워 모을 생각이에요.”
이제는 여유를 갖고 일로매진해 온 시간들을 살필 때다. 키다리 아저씨가 주디를 불우이웃으로만 생각하고 도왔다면 저렇게 살아있는 편지들을 받을 수 있었을까. 몇 푼 도와준 그 사람을 끝까지 ‘불우’이웃으로만 규정하는 가난한 감성으로는 불우이웃을 끝내 이웃으로 만나지 못한다. 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만, 개미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세상에 무시해도 좋은 존재는 없다. 기쁨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슬픔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배려할 때가 있고 배려를 받아야 할 때가 있다.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 것이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
물론 누군가를 도왔으면 잊는 게 좋다. 사랑은 빚을 준 게 아니니까. 반대로 자존감이 뭔지 아는 사람은 자기를 배려해준 손길, 눈길을 기억한다. 자기를 배려해준 친절한 손길에 대한 기억은 또 다른 사랑으로 흐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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