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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칼럼]‘경쟁과 과학’이라는 킬러앱

입력 | 2011-04-24 20:00:00


황호택 논설실장.

모든 문명은 평등하다는 말이 있지만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세계를 주도한 것은 분명히 서구 문명이었다. 1500년에 유럽 국가들은 전 세계 영토의 10% 정도를 보유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해인 1913년 11개 유럽 제국은 전 세계 영토의 60%를 지배하고 전 세계 부(富)의 79%를 생산했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는 중국의 베이징이었다. 당시 베이징의 인구는 60만 명이었고 파리는 20만 명, 런던은 5만 명이었다. 1420년에 완공된 쯔진청(紫禁城)은 세계 최고의 문명이었다. 서구가 이렇게 앞섰던 중국 문명을 추월하고 세계를 선도(先導)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영국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새 책 ‘문명-서구와 그 나머지’에서 서구에 우월성을 안겨준 대표적인 킬러앱(killer application)은 경쟁과 과학이라고 분석한다. 킬러앱은 경쟁상품을 몰아내고 시장을 재편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의미한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1000만 가입자를 확보한 카카오톡 같은 앱이 바로 킬러앱이다. 중국은 강력한 황제가 통치하는 통일국가여서 혁신과 경쟁이라는 킬러앱을 육성하지 못했다. 반면에 유럽은 수많은 산과 강으로 분할돼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도시국가로 발전하면서 각국이 창조적 경쟁에 몰두하게 됐다.

KAIST 본령 흔들려선 안 돼

중국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때인 1405∼1433년 정화(鄭和)가 황제의 명을 받아 7차례에 걸쳐 대선단(大船團)을 지휘해 서남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 케냐까지 30여 나라에 원정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훨씬 전에 중국의 대륙 탐험이 있었다. 하지만 영락제가 죽고 나서 돛대 2개 이상을 가진 배를 만들어 먼바다로 나가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가 됐다. 중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여러 나라의 군주가 식민지 확보 경쟁을 벌였다. 서구가 신대륙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유라시아 대륙의 낙후지역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유럽은 과학자를 우대했다. 1727년 아이작 뉴턴이 죽었을 때 그의 시신은 4일 동안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사원에 안치됐고 공작 백작 대법관들이 운구를 맡았다. 프랑스의 작가 볼테르가 이 광경을 목도하고 천한 집안 출신의 과학자가 제왕 같은 장례식을 가졌다고 기록했다. 오늘날의 위대한 과학적 발견, 의약품, 정치제도, 대학의 학문이 대부분 서구에서 유래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계 역사에서 경쟁과 과학을 장려한 나라는 흥했고 그러지 않은 나라는 쇠했다. 한국이 20세기 초 식민지의 고통을 겪은 것도 바로 경쟁과 과학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2008년 KAIST에 진학한 아들의 입학식에 참석했다. 서남표 총장은 영어와 한국어로 동시에 진행된 입학식에서 21세기의 과제인 에너지 환경 물 그리고 자연과 천연자원을 보존 관리하는 지속가능성을 해결하기 위해 학문 연마와 리더의 자질을 길러 달라고 강조했다. 학부모들의 마음을 뿌듯하게 하는 입학식이었다.

KAIST 학생 4명이 자살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전문계 고교 출신 로봇영재를 입학사정관 제도로 뽑아놓고 영어수업에 적응 못하도록 방치한 것은 대학의 잘못이 크다. 그러나 이 나라의 대표적인 공과대학에서 몇 명 부적응 학생이 발생했다고 해서 경쟁과 과학영재의 육성이라는 본령(本領)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부적응 학생은 상담과 치유 차원에서 접근하면 된다.

영재집단에도 나약한 심성을 가진 학생들이 있을 것이다. 그해 입학식의 말미에 학생처장이 “어머니들이 학교에 전화 좀 걸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던 말이 인상적이었다. “학생들이 기숙사에 불만이 있으면 사감에게 시정을 요구하고, 그것도 성에 안 차면 학생처장실이나 총장실로라도 쳐들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왜 대학생 자녀를 유치원생 어머니처럼 챙겨줍니까.” KAIST에는 과학고 출신 학생이 70∼80%에 이른다. 엄마가 알아서 다 챙겨주는 헬리콥터 맘이 아이들의 의존증을 길러주고 심성을 약하게 만들 수 있다. 경쟁적 상황에 수반되는 스트레스를 견뎌낼 수 있는 강한 심성을 길러주는 일은 인생을 살아감에서 학업성적 못지않게 중요하다.

나약한 심성 강하게 단련해야

필자는 징벌적 학점 제도에는 반대한다. 행동심리학에 심리회계(mental accounting)라는 말이 있다. 학점이 나쁜 데 따른 열패감과 상실감이 클 텐데 남들이 안 내는 수백만 원의 등록금을 부모에게 타내자면 죽기보다 더 싫을 것이다. 수입이 없는 학생들에게 수백만 원은 심리회계상 지갑이 두툼한 어른이 인식하는 돈의 크기와는 다르다. 경쟁에서 앞선 학생들에게 상을 주어 선망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이, 뒤처진 학생들에게 ‘징벌’을 주는 방식보다는 교육적으로 효과가 크고 부작용이 적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