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미워서 앞만 보고 달렸다
아니,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런데 난데없이 아버지라니….
그날 자신의 삶에 불쑥 나타난 아버지는 당신의 둘째아들을 10여 년 만에 처음 보고서도 아무 말씀이 없었다. 학교를 잘 다니고 있느냐는 인사치레조차 하지 않았다.그 후, 200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는 이계안과 같이 산 적이 없다. 함께 식사를 한 것도 100번 남짓이다. 오히려 아버지의 존재가 이계안의 발목을 잡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삶의 중대한 결절마다 이계안의 아버지는 큰 그림자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비록 그걸 깨닫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고, 아버지를 온전히 인정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
이계안 씨는 1998년 12월, 입사 22년 7개월 만에 46세의 나이로 현대자동차 기획조정실 사장이 됐다. 샐러리맨의 신화였다. 그러나 총선을 앞둔 2004년 2월 돌연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어리둥절해 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세용 전 현대상선 사장에 이어 현대그룹에서 세 번째로 40대 사장(이 대통령은 30대)이 된 그가 왜 하필 정치를, 그것도 진보성향의 정당에서 시작해야 하는지를 의아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 씨는 “진보정치를 했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고 답하곤 했다. 정치라는 ‘사회적 유전자’가 피에 흐르고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 사형수 정치범이었던 아버지
그러나 정작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 씨는 “없어요. 아무 생각도 없어요. 참 미웠어요”라고 말한다. 단순히 따로 살았던 아버지에 대한 거리감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도 인색하지 않아 마을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수원고등농림학교(서울대 농대의 전신)를 졸업한 그의 아버지는 광복 후 죽산 조봉암 선생의 사상을 따르며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군 방첩대에 체포돼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의 할아버지가 땅을 팔아가며 돈을 써서 겨우 무기징역형으로 끌어내렸고 1962년 가석방됐다. 그리고 계안 앞에 처음 나타났다.
그러나 이 씨의 아버지는 다른 여성과 딴살림을 차렸다. 연좌제 탓에 이 씨의 형(이계찬 씨·2007년 작고)은 36세가 될 때까지 직장을 갖지 못했다. 이 씨 할아버지는 많던 재산을 옥바라지로 탕진했다. 때문에 한글도 깨우치지 못한 이 씨의 어머니(2002년 작고)가 방물장수로 이 마을 저 마을 행상을 다니며 집안 살림을 지탱했다. 그래도 그의 아버지는 한 번도 집에 돈을 갖다 준 적이 없었고,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항상 당당했다.
그래서 이 씨는 “어머니 생각을 하면 (아버지가) 용서가 안 되지요”라고 말한다. “우리 어머니의 평생 삶은 무엇이었을까요. 언제 한 번이라도 행복했을까요. 어머니를 통해서 본 아버지는 납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내가 정주영만 못한 게 뭐냐?”
출소한 아버지가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그에게 그냥 말했다. “경기중학교를 가라.” 공부를 잘해서 졸업할 때 도지사가 주는 상까지 받았지만, 평택 작은 마을의 소년에게 경기중은 언감생심이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아버지였지만 그 한마디는 이 씨를 자극했다. 경기중 시험에 떨어졌지만 계속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싹텄다.
쑥 커버린 몸에 맞는 새 교복을 살 돈이 없어 다니던 중학교를 그만둘 정도의 어려움을 딛고 그는 경복고에 진학한다. 공부를 썩 잘했던 그는 서울대 법대 행정학과에 진학해 공무원이 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3 시절 아버지가 느닷없이 그를 불렀다. “어느 대학에 갈 테냐?” “법대에 가서 고시를 볼 생각입니다.” “그래…. 네 형하고 상의해 봐라.” 그 말뿐이었다. 이 씨는 당시 아버지의 표정이 “처연했다”고 회상한다. 연좌제 때문에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둘째아들 보기가 민망했을 터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목을 붙잡고 여러 명사에게 인사를 다니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정일형 전 외무부장관, 윤길중 전 국회부의장, 구상 시인 등을 그때 이미 만났다. 아들의 장래를 부탁하는 마음과 함께 똑똑한 아들을 자랑하고 싶은 욕심도 있어 보였다. 당시 자신의 속마음은 ‘아버지가 도와준 게 뭐 있다고…’였다고 이 씨는 털어놓았다.
1976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해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1988년 남들보다 훨씬 빨리 부장대우가 됐다. 그해 서울대 상대 71학번 동기인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이 첫 의원 배지를 달았다. 그즈음 아버지가 서울 계동 현대사옥 앞에 나타났다. 지하다방에서 만난 아버지의 일성(一聲)은 “내가 정주영이만 못한 게 뭐가 있느냐”였다. “너하고 몽준이하고 학교 같이 졸업했지 않느냐. 몽준이는 국회의원 됐는데 너는 뭐하고 있느냐!” 이 씨는 ‘정말 터무니없는 아버지다’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약인 셈인가. 이 씨는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내 삶은 도전이었다”라며 “(자신이) 가슴에 품어서는 안 될 꿈을 (아들에게) 강요하신 것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아들에게 투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 아버지와 화해하는 길
이 씨의 아버지는 출소 후에도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장기간 외출을 할 때는 경찰에 신고를 해야 했다. 보호관찰제도 때문이었다. 친척이나 동네 사람들도 이 씨 집에 드나들기를 꺼렸다. 이 씨는 “그렇게 보면 아버지가 딱하죠. 누구처럼 국회의원을 했나, 대통령을 한 것도 아니고…. 아버지는 그저 세상을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한 것뿐인데 말이죠.”
이 씨는 정치를 시작한 뒤부터 아버지를 ‘발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콜럼버스가 이미 존재하던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그는 자신에게 긍정적인 힘과 부정적인 힘을 동시에 줬던 아버지를 다른 관점에서 보고자 했다.
이 씨는 여전히 아버지를 생각할 때 감정을 잘 추스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참 미웠다”, “용서하기 쉽지 않다”라고 할 때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이 씨는 “내가 이렇게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어쩌면 화해의 과정인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를 찾는 이계안의 오디세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사진=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