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 경제부 차장
하지만 정치인이나 국가, 공기업이 국민을 대상으로 제시해 놓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 사정이 아주 다르다. 약속의 무게감이나 파장권역이 한 개인의 다짐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남권 신공항이나 과학비즈니스벨트가 들어설 자리를 놓고 벌어졌거나 벌어지고 있는 상황 때문에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정부로부터 사업승인을 받아놓고 착공하지 않은 공공주택 누적물량이 무려 51만 채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계기였다.
LH의 승인 후 미착공 물량은 2001년 7만 채에 그쳤다. LH가 2009년 10월 출범했으니 그 이전은 옛 대한주택공사에 해당되는 일일 것이다. 어찌됐든 이 미착공 물량이 10년 만에 7배 넘게 폭증했다. 2004년 이후 옛 주공이든 LH이든 한 해에 대략 10만 채 정도의 공공주택을 짓겠다고 승인을 받았다. 그러니 51만 채라면 5년 동안 승인 받은 물량의 합계에 해당한다. 즉 LH는 5년 분량의 공공주택을 짓는다고 해놓고 손을 놓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승인 물량이 폭주한 반면에 LH의 체력은 갈수록 허약해져갔다. 공공주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임대주택은 초기에 사업비가 모두 들어가지만 이 돈을 회수하는 데는 5∼30년이 걸린다. 임대주택을 지으면 지을수록 빚이 쌓여 간다는 얘기다. 옛 주공이 옛 한국토지공사와 통합할 때 부채가 이미 64조 원을 넘었다. 2009년 LH의 부채는 109조 원으로 불어났고 지난해에는 125조 원이 됐다. 내년에는 143조 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부채 규모로 볼 때 공기업 중 1위다.
결국 LH는 지난해 공공주택 1만5000채를 착공하는 데 그쳤다. 최근 10년간 최저 수준이다. 서민의 주거안전망을 책임지는 공기업으로서는 ‘기능 마비’ 상태라고 봐야 한다. LH는 올해 착공 물량을 6만 채 수준으로 끌어올린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약속을 지킬지는 올 연말에나 알 수 있다. LH의 현 상황을 누구의 책임으로 돌릴지는 각기 판단이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최종적인 피해자는 서민이라는 데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
이진 경제부 차장 lee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