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치영 뉴욕 특파원
세계 최고의 공과대학이라는 MIT 캠퍼스에는 방문객의 눈길을 끄는 상징물이 있다. 지진으로 무너져 내린 듯한 외형으로 MIT 내 대표적인 건물로 손꼽히는 ‘32번 건물’ 로비에 설치된 소화전과 소방호스다.
1971년부터 1980년까지 총장을 지낸 제롬 와이즈너 전 총장이 “MIT에서 공부하는 것은 소방호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을 받아 마시는 것과 같다”고 말한 뒤 소화전과 소방호스는 MIT의 상징이 됐다. 학생들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공부를 시키는 게 MIT의 전통이다. 1984년부터 MIT 전기공학과 교수를 지내고 있는 이해승 석좌교수는 “MIT는 ‘학생들은 어차피 가르치는 것의 30% 정도밖에 소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많이 가르칠수록 많이 습득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고 설명해줬다.
그만큼 학생들이 학업으로 받는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치열한 경쟁, 아무리 공부해도 상대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 항상 1등만 하다 중간 이하의 성적표를 받아든 후의 좌절감 등은 KAIST나 MIT 학생들이 똑같이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MIT 학생들에게는 KAIST에는 없는 게 있어 보였다. 이들에게는 속을 털어놓고 고민을 상담할 수 있는 상대가 있었다. 이런 상대는 MIT 학생들에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분출구가 됐다.
물리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윤지원 씨에게는 ‘학생지원센터’에서 만나는 전담 카운슬러 제임스가 그런 상대다. 윤 씨는 MIT에 입학하자마자 몸이 안 좋아 쓰러진 일이 있었다. 이때 만난 제임스는 윤 씨의 강의 일정도 조정해주고 좋은 의사를 알아봐 소개해주기도 했다. 이 일이 인연이 돼 윤 씨는 별 일이 없어도 한 달에 두세 차례씩 제임스를 찾아가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는다.
경영학과 3학년 임수현 씨는 지도교수에게 여행 얘기에서부터 성적 고민, 수강 신청 등 별 얘기를 다 한다. MIT의 모든 학생은 1학년 때 지도교수가 정해진다. 2, 3년간 지도교수와 만나다 보면 공식적인 교수-학생 관계보다 훨씬 깊은 신뢰와 친밀감이 쌓이게 된다.
학교 친구들이나 대학원 선배들도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다. 화학과 3학년 이상현 씨는 학부생 기숙사에는 층마다 대학원생이 한 명씩 배정돼 있는데 친형처럼 가깝게 지내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최근 학생들이 잇따라 자살한 뒤 KAIST 안팎에는 소통 부족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다. 이에 대해 서남표 총장은 “소통이 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고 토로했다. 소통이란 그리 어려운 게 아닐 수도 있다. 카운슬러, 교수, 학생, 선배 등 누가 됐든 학생들이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해 주는 게 훌륭한 소통의 첫 단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신치영 뉴욕 특파원 higgle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