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장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대북정책과는 별개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식량 지원을 검토 중임을 밝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 역시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미국이 한국과의 공조를 뒤로하고 단독으로 대화국면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고 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태에 대한 북한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 없는 한 북한과의 그 어떤 대화도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도 이제는 대북정책의 방향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 지난달 26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포함한 전직 국가수반 모임인 엘더스(The Elders)그룹 4명이 2박 3일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북한의 식량 부족 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 역시 최고조에 달했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카터의 방북으로 경색된 북-미 관계, 남북한 관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실망스러운 방북결과 美서도 비판
카터의 방북 결과는 지극히 실망스러웠다. 카터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메시지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북한의 기존 입장만 되풀이했다. 인권과 관련한 질문에 카터는 오히려 “한국과 미국 정부에서는 의도적으로 북한으로 가는 식량 지원을 억제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인권 침해”라고 대답했다. 대통령 재임 당시 그토록 집요하게 한국의 인권상황을 문제 삼던 사람의 발언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억류된 미국 인권운동가의 석방을 목적으로 공산독재국가 쿠바를 3월에 방문한 카터를 미국의 조야는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역시 아무런 성과 없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월스트리트저널의 한 칼럼니스트는 카터를 가리켜 “쿠바 군사독재의 앞잡이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혹평했다. 미국에서 가장 친(親)민주당 성향을 보이는 대표적인 정책 뉴스레터인 ‘넬슨 보고서’도 카터의 방북을 앞두고 “잔인할 정도로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버지 부시 행정부 때부터 미국의 모든 행정부는 카터를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간주해왔다”고 밝히고 있다.
카터는 식량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한국과 미국을 비판하지만 식량을 가장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북한이다. 북한 식량 문제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연구를 수행해 온 스티븐 해거드 교수와 마커스 놀런드 박사에 따르면 북한 식량 지원과 군사력 증강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들의 통계분석에 따르면 1998년 북한에 대한 외부세계의 식량 원조가 늘면서 북한의 식량 수입량은 급감한 반면 다른 물품 수입은 급증했다. 단적인 예로 1999년 북한 식량난이 어느 정도 해결된 이후에도 남한과 세계식량계획의 원조가 지속되자 북한은 여유자금을 빼돌려 카자흐스탄으로부터 공군기를 대량 구입했다.
카터는 이러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북한과의 대화를 지지하는 미 상원 외교분과 위원장인 존 케리조차도 대북 식량 지원 재개는 식량이 북한의 정부 관리나 군부대로 유출되는 일 없이 7세 미만 아동과 부녀자들에게 확실하게 전달된다는 보장이 있어야만 결정될 수 있는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美 인도적 식량지원 개연성 남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북한에 식량 지원을 재개할 개연성은 남아 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이 카터와 같이 북한 사정에 어두워서도,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에 불만이 있어서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혹시라도 실제로 고통받는 북한 주민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알면서도 속아주는 것이다. 카네기연구소의 더글러스 팔이 말하듯이 오바마 정부가 환상을 갖고 있기는커녕 이번에도 북한 비핵화에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할 수 없이 하는 일이다. 한미 공조는 공고하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카터가 또 자신의 업적이라고 착각을 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