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욱 논설위원
문제는 당의 새 간판이 될 대표감을 찾는 일이었다. 물밑에서 여러 대안이 모색됐지만 박근혜 의원과 손학규 경기도지사가 유력 후보로 압축됐다고 한다. 당내에서 비주류였지만 개혁성과 참신함이 두 사람의 강점이었다. 두 사람이 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에 출마해야 한다는 압박이 전방위로 가해졌다. 당 대표 출마는 두 사람의 정치 인생을 건 결단인 만큼 고민도 깊어졌다.
손 지사는 측근 회의를 소집했다. 젊은 그룹은 당 대표 출마의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 대표를 맡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에 맞서 당을 살려낸다면 차기 대권을 향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이에 대해 중장년 그룹은 “도지사 임기가 절반이 남았는데 중도에 포기하면 역풍이 더 불지 않겠느냐”라고 반대했다. 결국 손 지사는 당 대표 출마를 접었다.
박 의원 진영도 장고에 들어갔다. 당시 당내 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당대회 승리도 낙관하기 어려웠다. 설령 당 대표가 되더라도 거센 탄핵 역풍에 국회의원 총선을 제대로 치러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자칫 탄핵정국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당 대표직에 승부를 걸었다. 그는 ‘천막당사’ 리더십을 발휘해 당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지금의 박근혜를 있게 한 정치적 자산이 됐음은 물론이다.
‘손학규발’ 폭탄에 맞은 한나라당에선 2004년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 어제 국회에서 열린 한나라당 의원 연찬회에선 친이(親李) 주류 실세의 2선 퇴진과 박 전 대표의 구원 등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한 의원은 박 전 대표를 의식한 듯 “천막당사 정신으로 다시 승부하자”고 외쳤다. 1년도 안 남은 내년 총선의 암울한 전망에 겁먹은 의원들에게서 “내 탓이오”라는 자성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통령 특사로 유럽을 방문 중인 박 전 대표도 귀국하면 당의 진로를 놓고 계속 묵묵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장 당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부담스럽겠지만 “당의 위기를 나 몰라라 한다”는 지적을 그냥 흘려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다.
야권 내에서 누구보다 한나라당의 생리를 잘 알고 있을 손 대표는 박 전 대표의 귀국 후 대응을 예의주시하며 다음 행보를 준비할 것이다. 위기와 기회는 동전의 양면이다. 성패는 항상 변화와 쇄신, 결단의 리더십에서 갈렸다. 여야의 유력한 대선주자인 두 사람이 그동안 걸어온 길이 그랬다. 본격적인 대선 정국의 막이 올랐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