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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금융신뢰 벼랑끝에 서다

입력 | 2011-05-05 03:00:00

우량한 제일저축銀까지 예금인출 사태




불안한 고객들 예금인출 북새통 4일 오전 서울 중구 장충동1가 제일저축은행 장충동지점은 예금을 인출하려는 고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임직원 개인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가 예금 인출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지만 금융당국은 제일저축은행이 최근 5년간 순이익을 내는 등 우량한 저축은행이라며 예금 인출 자제를 당부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대한민국 금융시스템이 총체적 신뢰의 위기에 빠졌다. 부산저축은행 대주주와 임직원의 탈·불법에다 금융감독 당국의 무능과 부패까지 겹치면서 국민은 금융시스템 전체를 불신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선 초우량 금융기관도 조그만 악재나 악성 루머에 순식간에 뱅크런(대규모 인출사태)을 맞아 문을 닫게 된다. 제일저축은행 임직원이 대출 비리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 저축은행의 각 지점은 4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금을 인출하려는 고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제일저축은행은 영업시간을 3시간 이상 넘기면서까지 업무를 처리했으나 대부분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지점이 문을 닫은 오후 8시 10분까지 기다린 고객들도 결국 돈을 찾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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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신사동 제일저축은행 논현지점에는 이날 오전 9시 영업 개시와 동시에 300여 명의 고객이 창구로 몰렸다.

이명박 대통령이 금융시스템 신뢰회복을 위해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을 직접 방문한 시간은 9시 50분경. 고객들은 1시간 전부터 은행을 찾았다. 논현지점 직원 12명 전원이 고객 응대에 나섰지만 회의실과 화장실까지 꽉 들어찬 고객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역삼동에서 왔다는 한 50대 여성 고객은 “영업정지가 아니라고 해서 마음 놓고 있다가 예금인출 인파가 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부랴부랴 달려왔다. 오전 10시 반에 왔는데도 (대기번호가) 540번이었다”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여의도지점을 찾은 김모 씨(71·여)도 “아무리 은행과 정부에서 문제가 없다고 해도 부산저축은행 사태를 본 뒤라 믿기 힘들다”며 “돈을 찾기 전까지는 무슨 소리를 해도 믿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태가 일파만파로 확산되자 금융당국과 검찰, 저축은행중앙회가 일제히 ‘우량한’ 제일저축은행 구하기에 나섰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4일 제일저축은행 문제와 관련해 “(제일저축은행은) 유동성이 꽤 있고 필요하면 자금을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일저축은행이 일부 예금인출 사태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으로 충분한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는 만큼 ‘안심해도 좋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금융당국의 수장(首長)으로서 이번 예금 인출 사태를 수수방관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금감원도 이날부터 시작한 제일저축은행 검사는 저축은행의 건전성과 관련된 게 아니라 임직원의 개인비리를 확인하는 차원이라고 밝혔다.

주재성 금감원 부원장은 “제일저축은행 계열은 6500억 원의 자체 유동성을 확보했고 저축은행중앙회도 8000억 원의 긴급 자금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유동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원리금 5000만 원 이하 예금은 전액 보호되므로 중도 해지에 따른 이자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예금을 인출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 “우량 저축銀 지켜라” 금융당국-검찰-관련단체 일제히 나서 ▼

“부실 아닙니다” 안내문에도… 4일 오전 서울 중구 장충동1가 제일저축은행 장충동지점에서 한 예금자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예금인출 자제를 당부하는 안내문을 읽고 있다. 금융당국이 “제일저축은행은 우량한 저축은행”이라며 중도인출 자제를 당부했지만 예금자들은 “금융당국도 못 믿겠다”며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이번 사건을 수사한 의정부지검 고양지청도 “검찰 수사는 임직원의 개인 비리에 한정된 것이었고 전반적인 부실·불법 대출 여부에 대해선 수사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이런 소식은 제일저축은행 지점에 실시간으로 전해졌지만 오후 들어서도 예금인출 행렬은 늘어만 갔다.

은행 직원들이 금융당국과 검찰이 내놓은 자료와 관련 뉴스를 출력해 고객에게 나눠줬지만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송파구 가락동 본점에서는 금감원과 예금보험공사 관계자가 와서 “저축은행 자체의 문제가 아니며 예금액은 보호받을 수 있다”는 내용의 설명회를 세 차례에 걸쳐 진행했다. 각 지점은 이 영상을 TV로 중계하기까지 했지만 고객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영등포구 신길동에 사는 심모 씨(44)는 “금감원 내부의 부정부패 얘기가 흘러나오고 금융권의 관리 소홀로 검찰 수사를 받는 판에 금융당국을 어떻게 믿느냐”며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내 돈부터 찾아야겠다”고 말했다.

이날 제일저축은행의 각 지점은 영업시간 마감인 오후 5시를 훌쩍 넘겨 오후 9시까지 고객을 받았지만 일부 업무만 처리할 수 있었다. 지점에서는 이날 처리할 수 있는 고객의 대기번호를 정해 공지하고 이후에 찾아온 예금자들은 돌려보내는 식으로 창구 정리에 나섰다. 이날 제일저축은행에서 인출된 돈은 800억 원, 제일2저축은행은 200억 원 등 모두 1000억 원으로 전날 600억 원보다 400억 원가량 많았다. 가락동 본점에서 이날 하루 발급된 번호표 3600개 가운데 19.4% 정도만 예금 인출이 이뤄졌고 나머지 9개 지점에서도 1000∼2000여 개씩 발급됐으나 약 20%만 처리됐다고 제일저축은행 측은 밝혔다.

일부 지점에선 예금자들이 기다림에 지쳐 은행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고 뒷 번호 고객의 거센 항의가 이어지기도 했다. 본점을 찾은 50대 남성은 오후 8시가 넘으면서 약속한 고객의 업무까지 모두 끝나자 “오전부터 와서 기다렸는데 내 돈을 못 찾는 게 말이 되느냐”며 “불안해서 더 못 기다리겠으니 지금 당장 예금을 인출해 달라”고 소리쳤다. 제일저축은행 관계자는 “불안심리가 극도로 높아진 것 같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다. 금융당국과 검찰 얘기도 믿지 못하는 상황이니 은행 말이 들리기나 하겠느냐”며 한숨을 쉬었다.

저축은행중앙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제일저축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은 8.28%로 최근 3년간 8% 이상을 유지하고 있으며 2006년 이후 지난해까지 5년 연속 흑자를 냈다. 부실대출 비율도 6.1%로 저축은행 평균(10.6%)을 밑돌았다.

금융기관 관계자는 “제일저축은행이 무너진다면 웬만한 금융기관은 뜬소문에도 다 문 닫고 말 것”이라며 “금융감독 당국이 다시 신뢰를 얻고 금융시장이 정상화될 수 있느냐는 제일저축은행 사태의 결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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