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관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민주주의 국가들은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믿음 아래 미국의 외교정책은 오랫동안 ‘팍스 데모크라티아(Pax Democratia·민주정치를 중심으로 한 평화)’를 추구해 왔다. 유럽 국가들도 1945년 이후 민주주의를 지역 통합의 핵심 요소로 삼아 왔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다양한 정치 시스템은 이런 민주적 평화를 적어도 지금은 힘들게 만들고 있다.
또한 경제적 상호의존이 심화되면 평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동아시아 국가 간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커져왔고 지난 수십 년간 자유무역의 혜택을 누려 왔다. 그러나 지난 2, 3년 동안 미중, 중일 간 갈등을 지켜본 사람은 과연 경제 의존 심화가 동아시아 평화에 기여하는 것인지 의심하고 있다.
그런데 유럽과 대조적으로 동아시아는 국가별 규모와 발전 정도, 정치경제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동아시아의 정책결정자들은 이웃 국가의 정치시스템을 민주주의로 바꾸거나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심화시키기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정책 입안자들은 지역 차원의 제도를 건설하기 위해 활발한 논의를 해왔는데 아세안+3,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등이 그 사례이다. 그러나 이런 제도화의 과정도 핵심국가 간 영향력 경쟁으로 정치화돼 버렸다. 동아시아는 유럽연합의 설계자였던 장 모네나 로베르 쉬망처럼 지역 평화를 위한 비전을 가진 정치적 지도자가 부족한 듯하다.
따라서 동아시아인들은 지역 협의체 문제를 실용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지역 전체를 포괄하는 거대 협의체를 만드는 데 힘을 쏟기보다는 작지만 문제 중심의 협의체에 더 집중하는 편이 낫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에서 지역 경제 협력을 향한 첫 성공 사례는 1997∼1998년 금융위기 이후 국제 통화 스와프를 위해 만들어진 치앙마이 이니셔티브다.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 역시 지금껏 중대한 결론은 내지 못했지만 안보문제를 집단적으로 다루기 위한 유일한 메커니즘으로 남아 있다.
일본의 원자력발전소 재앙은 원자력 안전을 위한 또 다른 문제 중심적 지역 협의체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일본의 이웃 국가들에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는 충분하지 않다. 5월 도쿄에서 열리는 한중일 정상회담은 원자력 안전 협력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는 데 초점을 모을 필요가 있다.
덜 거창하고 규모가 작지만 기능에 중심을 둔 협의체 설립은 동아시아 평화 건설의 동력이 될 것이다. 로마 역시 하루아침에 건설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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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관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