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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현장 체험]삼촌 팬

입력 | 2011-05-14 03:00:00

휴가 쓰며 팬클럽 활동했더니 인사고과 1등




“씨스타19, 사랑해!” 삼촌팬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스튜디오 안을 가득 메웠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무조건 큰소리로 외치면 돼요.”

“사랑해요, 씨스타!”

벌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려 작게 소리를 내 봤다. 열혈 ‘삼촌팬’ 이호성 씨(33)가 건네준 ‘마 보이(Ma Boy)―응원법’에는 파란색 사인펜으로 중간 중간 밑줄이 굵게 쳐져 있었다. 걸그룹 ‘씨스타19’가 무대에서 신곡 ‘마 보이’를 부르는 동안 팬들이 외치는 응원 구호였다. 씨스타19는 최근 원래 ‘씨스타’ 멤버 4명 중 2명만으로 유닛(unit)을 꾸려 활동에 들어갔다.

응원법에 따르면, 노래 가사 ‘혼자 두지 않겠다고 했잖아’ 뒤에는 멤버들 중 한 명인 ‘윤보라’를 외치고, ‘한마디 말이면 되는 걸’이라는 부분은 함께 따라 불러야 한다. 짧고 간단한 내용들이었다. ‘훗, 이 정도쯤이야’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삼촌팬들은 보통 30, 40대 남성들로 이뤄져 있다. 직업은 회사원부터 자영업자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주로 아이돌 가수, 특히 걸그룹을 응원한다. 소녀시대 공식 팬카페에는 ‘오빠삼촌방’이 마련돼 있을 정도. 삼촌팬들은 조카 같은, 심지어 딸 같은 소녀들을 따라다니는 이유에 대해 “무조건 좋아서”라고 답했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지금의 30, 40대는 1980년대 이후 대중문화가 주류 문화로 편입되는 상황 속에서 성장했다. 따라서 사회적 규범이나 틀에 강하게 얽매여 자신들에게 허락된 대중문화만을 소비하던 예전의 30, 40대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솔직하게 각자 자신의 취향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 소녀팬들 옆에서 응원 연습

7일 낮 12시 경기 고양시에 위치한 MBC 드림센터 1층 로비. 구석에서 삼촌팬들의 응원구호 연습이 한창이었다. 사극 드라마에 출연하는 연기자들이 오가고, 곧 시작될 ‘쇼! 음악중심’ 사전 녹화를 기다리는 소녀팬들도 여기저기 보였다. 오후에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정장을 차려입고 온 이 씨 때문에 삼촌팬들은 더 도드라져 보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리듬에 몸을 맡긴 채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응원 구호를 맞춰 보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기자만 연방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역시 ‘고수’는 달랐다. 노래 가사뿐만 아니라 응원 구호까지 완벽하게 암기한 이 씨는 서너 번 맞춰 보더니 쓰윽 빠졌다. 그는 징검다리 휴일이었던 6일에도 회사에 휴가를 내고 KBS ‘뮤직뱅크’에 다녀왔다. 8일에는 SBS ‘생방송 인기가요’ 공개 방송에도 갈 계획이라고 했다.

기자를 포함해 아직 응원 구호를 외우지 못한 삼촌팬들이 각자 흰 종이를 하나씩 손에 들고 개인연습에 들어갔다. “아, 왜 이렇게 헷갈려. 이걸 어떻게 다 외워요!” 자연스레 입에서 하소연이 흘러나왔다. 반복되는 가사가 많다 보니 어디에서 어떤 구호를 외쳐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하루하루 신나니 일도 잘하죠

4시간을 기다린 끝에 겨우 사전 녹화가 진행되는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스튜디오 안에서도 스태프가 무대 위를 정리하는 동안 20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설레지 않아요?”

“전혀요. 이미 그럴 단계는 지났죠.”

문득 거울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여 혼자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날까 봐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씨스타19가 무대 위에 등장했다. 이 씨가 큰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이 친구 부산에서 왔어요.”

“우리 어제 부산에서 공연하고 왔는데….”

멤버 중 한 명이 이 씨의 외침에 웃으며 화답했다. 몇 마디 말이 몇 번 더 왔다 갔다 했지만 손에 쥔 응원법을 들여다보느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노래와 함께 삼촌팬들의 응원이 시작됐다. 순간 머릿속이 텅 비었다. 스타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연습한 응원 구호는 입가에만 머물렀다. 우렁찬 응원 소리에 조명을 든 스태프가 자꾸만 힐끔힐끔 뒤를 돌아봤다. 기자는 결국 노래가 끝날 때까지 제대로 된 응원 한 번 해보지 못했다.

“아무리 소리를 크게 질러도 주위에 눈치 주는 사람 하나 없잖아요. 이번에는 잘해 보세요.” 머뭇거리는 기자가 안쓰러웠는지 이 씨가 다시 한 번 용기를 북돋아 줬다.

또 한 번의 무대가 끝나자 이 씨가 “여기 새 팬 왔어요. 기자에요”라고 말하겠다고 했다. 필사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안 돼요!”

“왜요? 아이들이 새 팬 오는 것 엄청 좋아해요. 그리고 기자라고 하면….”

“쑥스럽잖아요.”

재차 의사를 물어보는 이 씨에게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줬다.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사전 녹화는 세 번 이어졌다. 팬들의 응원 소리가 커질수록 스타의 안무에도 더욱 힘이 넘쳤다. 중간 중간 카메라가 아닌 팬들이 서 있는 곳을 바라보기도 했다. 씨스타19가 스태프와 팬들에게 인사를 하며 무대를 내려갔다. 바로 옆에 서서 지켜보던 경호원이 빨리 퇴장하라고 재촉했다. 이 씨를 비롯한 팬들은 대기실로 향하는 그녀들을 보기 위해 자꾸만 고개를 뒤로 돌렸다.

스튜디오를 나서며 이 씨에게 물었다.

“팬클럽 활동이 직장 생활에 지장을 주지는 않나요?”

“전혀요. 팬클럽 활동이 오히려 삶의 활력소가 돼 하루하루가 행복해요. 그래서 그런지 팀원

70여 명 중에서 제 인사고과 성적이 1등이었다니까요. 학교 다닐 때 반에서도 1등을 못 해 봤는데…(웃음).”

○ 여대생팬 “삼촌팬 이해해요”

이보다 앞선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용산구의 한국저작권위원회 저작권 교육원에선 ‘우리 스타(★) 방위대 소속 저작권 지킴이’들의 주제발표가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대부분 ‘슈퍼주니어’ ‘빅뱅’ ‘비스트’ 등 남성그룹의 팬클럽 운영진들로 대학생들이 주를 이뤘다. 이 씨와 함께 씨스타 팬클럽 활동을 하고 있는 정모 씨(38)가 앞에 나가 그동안의 활동 내용을 발표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다 회사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귀엽게 봐 주세요.” 김 씨의 말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저 아이들은 나를 어떻게 볼까?’ 발표장에서 남자는 기자를 포함해 7명뿐이었다. 여자는 25명이 넘었다.

“저희 명함이에요.”

슈퍼주니어 팬클럽 중 한 명이 와 자신들이 직접 만든 명함을 내밀었다. ‘레알(real) 팬심의 정석! 우리 스타, 우리가 지킨다!’라고 적혀 있었다. 용기를 내 물었다.

“우리 같은 삼촌팬 보면 어때요?”

“어떻긴 뭐가 어때요. 우리랑 똑같은 팬이잖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에 대한 마음은 다 똑같은 것 아니에요?”

혼자 민망해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