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역사/스티븐 로저 피셔 지음·박수철·유수아 옮김/312쪽·1만8000원·21세기북스
책의 서술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진다. 첫 번째는 대상 영역을 좁혀가는 것이다. 동물-영장류-인간-어족-주요 언어를 거쳐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지배적인 언어인 영어로 귀결되는 트랙이다. 둘째는 다양한 의사소통 수단의 발전과정을 계통발생의 관점에서 다루는 것이다. 유인원과 인간 뇌 용량의 대형화-발성기관의 진화-인류의 이동-언어의 분화-국어의 탄생 그리고 세계화로 인한 언어통합의 요구와 세계 단일어로서 영어로 이어지는 트랙이다.
두 개의 트랙 모두 귀착점은 영어다. “현재 인터넷 자료의 80%가 영어로 작성돼 있다”, “영어를 선택해 번영할 것인지 영어를 무시해 도태될 것인지 강제적인 결단을 내려야 하는 형편이다”, “24세기 후반에는 지구에 영어가 세계 유일의 언어로 군림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저자는 뉴질랜드 폴리네시아 언어문학연구소 소장이다. 소수언어를 연구하는 학자라지만 역시 영미권 주변부 언어학자답다. 언어다원론자의 입장에서 이 책을 접한다면 영어패권론자다운 발상이라는 비판이 나옴 직하다.
이런 서구중심주의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게르만어의 지역어였던 영어가 왜 세계어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통찰은 음미해볼 만하다. 모국어의 순수성을 지키겠다는 언어순화주의에서 벗어나 다양한 외국 어휘를 차용하면서 모국어와 차별화된 뉘앙스나 사회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언어생태계를 풍부하게 가꿔냈기 때문이란 통찰 말이다. 이 책이 소수언어의 보존을 위한 언어다원주의가 일반화되기 전인 1999년에 발표됐다는 점을 충분히 감안하면서 읽어야 할 이유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