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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제균]5·18에 다시 보는 YS

입력 | 2011-05-19 03:00:00


박제균 정치부장

새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로 세계가 들뜬 1999년 12월의 어느 날 오후.

나는 상도동 김영삼(YS) 전 대통령 사저의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혼자였고, 기분도 별로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퇴임 2년이 돼 가는 YS가 갓 탈고한 회고록(‘김영삼 회고록―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백산서당)을 입수했다. 이를 발췌 요약해 신문 지면에 싣는 필자로 내가 지정됐다. 상도동의 문을 두드린 이유는 사전에 YS와 만나 보충 취재를 하기 위해서였다.

‘YS 머리 나쁘다’는 선입견 무너져

개인적으론 그리 유쾌한 방문이 아니었다. 외환위기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던 당시만 해도 YS에겐 ‘나라 망친 대통령’이란 낙인이 찍혀 있었다. 젊은 정치부 기자의 눈에 그가 집권을 위해 감행한 3당 합당은 차라리 원죄(原罪)였다. 이런 부정적 인식 때문인지, 사전에 읽어본 원고 또한 자신에게 유리하게만 기술했다는 느낌이 강했다.

YS와의 만남은 30분은 넘게, 한 시간은 못 되게 이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내가 갖고 있던, 아니 대부분의 사람이 갖고 있는 선입견 하나는 완전히 무너졌다. ‘YS는 머리가 나쁘다’는.

회고록은 그가 구술하고 비서진이 정리해 탈고했다는 게 YS 측 발표였다. 그를 만나기 전 과연 YS가 인쇄 분량만 1100쪽이나 되는 회고록을 전부 구술했을까, 남이 대신 써준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웬걸…. 그는 회고록 내용을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읊었다. 정치적 사건의 때와 장소, 경위에 대한 기억력이 비상했다. 그 기억이 역사적 진실에 100% 부합하느냐는 별개로 치더라도.

게다가 처음 만난 지 1시간도 안 된 내가 끌릴 정도로 강한 친화력이 있었다. YS에 대한 인상이 달라지면서 그에 대한 내 평가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사가 펴낸 책 ‘YS 문민정부 1800일의 비화’(1999년)의 한 토막.

“문민정부 출범 11일 만인 1993년 3월 8일 오전. YS는 권영해 국방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조찬을 함께했다. 권 장관이 쑥국을 두어 숟갈 떴을 때 YS가 입을 열었다. ‘오늘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을 바꾸려고 합니다.’ 같은 날 오전 8시 계룡대 육군본부 연병장에서 실시된 국기 게양식.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육사 17기)은 5분 남짓 훈시를 했다. ‘군도 새 정부의 신한국 건설에 적극 동참해야 합니다.’ 오전 11시 20분. 총장비서실장의 음성이 인터폰을 통해 들려왔다. ‘총장님, (국방)장관님 전화 왔습니다.’…”

육사 11기인 전두환 노태우를 필두로 한 군내 핵심 사조직 ‘하나회’ 척결의 서곡이었다. 다음 날 YS는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두 깜짝 놀랬제.”

쿠데타 위협 벗어난 지 20년도 안 돼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일 그때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집권했다면? 취임 11일 만에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하나회 제거에 돌입할 수 있었을까. DJ에게 사상적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던 군부세력이 맥없이 ‘무장해제’ 당했을까….

3년 전 이맘때, 대한민국 수도의 한복판이 밤마다 무법천지로 돌변했었다. 그때도 무법천지보다 훨씬 더 나쁜 쿠데타 걱정만은 안 할 수 있었던 건 YS 덕이 크다. 뜬금없이 웬 쿠데타 걱정이냐고? 기나긴 우리 역사에서 한국민이 쿠데타 위협에서 벗어난 건 채 20년도 안 된다.

YS에겐 수많은 공과(功過)와 영욕(榮辱)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하지만 쿠데타 위협을 덜어준 것만 해도 자신의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부터 31년 전, 광주에서 ‘5·18민주화운동’이 시작되자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는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박제균 정치부장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