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적 反반공주의-분단史觀 벗고 당당한 건국-근대화의 역사 쓰자”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 그동안의 시각이 ‘맹목적 반(反)반공주의’와 ‘분단통일 사관’에 편향돼 왔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학계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학계는 특히 대한민국의 건국과정과 발전상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1948년 정부 수립 경축식에 참석한 맥아더와 이승만(왼쪽), 같은 해 치러진 첫 총선인 5·10 총선 당시의 투표장 모습. 동아일보DB
일제의 지배를 받은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민족주의사관과 독재정권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민중사관이 나름대로 역사적 기여를 했지만 오늘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대한민국을 설명하는 데는 크게 부족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한때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했던 독재정권들의 정치적 억압으로 인해 현대사 연구가 제대로 수행되지 못했던 시기가 있었지만 민주화 이후 사회 성숙기에 들어선 지금은 현대사를 다원적으로 연구하기에 적절한 시점이라는 인식도 학회 출범의 배경이 됐다. 20일 창립기념학술회의에서는 김명섭 연세대 교수가 ‘한국 현대사 인식의 새로운 진보를 위한 성찰’을, 김용직 성신여대 교수가 ‘한국현대사연구와 사관의 문제’, 이명희 공주대 교수가 ‘한국현대사와 교과서 문제’를 발표한다. 주제발표문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 맹목적 반(反)반공주의 극복해야
김명섭 교수
김 교수는 “1인 장기 집권의 이념적 도구가 됐던 반공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온 ‘반반공주의’를 일부 진보진영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반공주의의 야만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그것이 반대하고자 했던 공산주의의 야만에 대한 고찰과 함께 이뤄질 때 가능하다”며 “한국의 경우 히틀러의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가르치지만 스탈린의 고려인 대량학살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 인식적 불균형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히틀러에 의한 홀로코스트를 소개하면서도 스탈린이 자행한 고려인 대량학살은 소개하지 않는 제주 4·3평화공원 전시관을 예로 들었다.
김 교수는 “진보진영이 북한 정권의 성격을 잘못 파악하는 (현실의) 인식적 기원은 북한 현대사에 대한 오인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북한 세습독재와 정치범수용소의 참상을 비판하지 못하는 퇴보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1975년까지 공산화의 파도 속에서 ‘사상으로서의 반공’이 지녔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대사를 바로 인식하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 ‘분단·통일’에서 ‘근대화·건국’ 사관으로
김용직 교수
김용직 교수는 ‘한국현대사연구와 사관의 문제’ 발표문에서 마르크스주의적 계급분석 방식으로 현대사를 해석한 분단·통일사관의 한계와 결점을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들의 연구는 남한 정부의 근대화와 자유평등 사회의 구축 노력에 대해 저평가하면서 북한 사회주의체제의 모순과 문제에 대해서는 관대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분단·통일사관을 비판하면서 ‘건국사관’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해방정국에서 대한민국의 국가 건설 과정은 매우 험난한 과정이었으며 이후 민주화와 산업화의 기틀이 되는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에 건국을 중심으로 현대사를 해석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건국사관은 분단의 책임이 일차적으로 1945년 9월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북조선 정권 수립을 지시한 소련에 있다고 보는 것이 통일·분단사관과 구별되는 점”이라고 밝혔다.
○ 교과서의 현대사 왜곡 바로잡아야
이명희 교수
6·25전쟁 관련 서술의 경우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한 장치나 제도 마련에 대한 노력을 무시하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혔다. 이 교수는 “전쟁에 대한 서술이 북한의 불법 남침이나 우리의 난관 극복 노력보다 전쟁의 피해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2000년부터 시작된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북한 정권의 변천상을 비교적 길게 서술하기 시작했지만 북한의 침체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거나 모호하게 얼버무리고 있다고 이 교수는 비판했다. 이 교수는 “통일 문제에 관한 서술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이라는 대한민국 헌법정신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평화통일만 강조했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의한 통일’은 서술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 학계 “한국현대사학회, 객관적 역사 정립 기대” ▼
○ 정치적 입장 배제해야
동서양사학자가 모두 참여한 대표적 역사 관련 학회인 역사학회의 김경현 회장(고려대 교수)은 “현대사의 속성은 ‘열려 있는’ 것이어서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입장을 찾기 어렵다”며 “이 때문에 현대사는 (문제가 있을 경우) 즉시 바로잡을 수 있는 속성을 갖고 있지 않음에 유념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이번 현대사학회가 보편적 설득력을 획득해야 정치학 외교학 경제학 사회학 등 타 분야의 참여가 명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립운동사 연구를 많이 하는 한국근현대사학회의 김희곤 학회장(안동대 교수)은 “참여 인사나 학회를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진 인물 가운데 뉴라이트 계열 인사가 많이 보여 학회모임이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게 아닌가 하는 점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 역사적 균형감 갖춰야
고문으로 참여하는 학계 원로들도 한국현대사학회의 균형성과 가치중립성의 중요성을 각별히 강조했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는 “기존에 현대사에서 조망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승만이나 박정희의 공적만 부각시키는 우를 범해선 안 될 것”이라며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에 맞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간 나머지 ‘절반’의 국민도 당연히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는 “더 많은 젊은 신진학자를 포용하는 방식으로 회원의 저변 확대를 통해 회원 구성에서 균형을 잡아야 편가르기식 학회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현대사학회는 좌파를 청산하고 우파로 결집하자는 측면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역사의 균형을 잡고자 만들어진 학회임을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재천 상지대 총장도 “한국 현대사를 바로잡기 위해 만든 학회인 만큼 좌우의 이념적 굴레에서 벗어나 근대사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정리하는 작업을 가장 우선시 해야 한다”며 “가치중립적 측면으로 역사 문제에 접근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 실증주의로 이념 대립 극복해야
좌우익 이념 대립은 실증주의로 해결해야 할 것이란 당부도 많았다.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는 “역사는 진실을 따지는 데 목적을 둬야지 이념적으로 우익이니 좌익이니 하는 관념을 두어선 안 된다”며 “이번 학회가 이런 좌우 이념을 벗어난 실증주의적 방법으로 진실을 밝혀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좌든 우든 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기존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기대도 높았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우리 현대사에선 잘못 알려지거나 의식적으로 왜곡된 역사가 많았다”며 “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는 과정과 분단 과정에 대한 역사 등을 실증적이면서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연구가 많아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간 우리는 현대사 연구를 제대로 못해 왔기에 이제 본격적으로 연구하자는 취지로 한국현대사학회를 결성한 것”이라며 “제대로 연구하려면 역사학을 하는 학자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분야의 학자도 같이 참여해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정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김진 기자 holyj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