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최고의 불탑이 경복궁에 외로이 서있는 내력
지광국사탑의 현재 위치는 사실 자연스럽지가 않다. 우선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폈던 조선의 법궁(法宮·임금이 사는 궁궐)에 불탑이 있는 것이 이상하다. 또 마땅히 함께 있어야 할 묘비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광국사탑이 궁궐에 자리하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묘탑의 주인인 지광국사 해린(海鱗·984∼1070)은 원주에서 태어났으며 속성(俗姓)은 원씨(元氏), 자(字)는 거룡(巨龍), 아명(兒名)은 수몽(水夢)이다. 그는 유학(儒學)에 능하고 문장과 법문도 출중해 고려 불교 법상종 중흥의 주역이 됐다. 뒤에 국사(國師)에까지 올랐다. 지광(智光)이란 시호는 그가 법천사에서 입적하자 왕(고려 문종)이 내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6·25전쟁 때는 포화에 탑 윗부분이 처참하게 부서졌다. 지금의 탑은 산산이 부서진 돌 조각을 붙여 보수해 놓은 것이다.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돌 조각을 접착해 놓은 표시를 볼 수 있다. 그 모습이 역사를 견디어 온 아픔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듯하다.
경복궁 안에는 지광국사탑 외에도 여러 개의 불탑이 있었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에 신축되면서 주변 ‘친구’들은 모두 이사를 갔다. 그러나 ‘부상’이 극심했던 지광국사탑은 경복궁 안에 홀로 남겨졌다.
어찌되었건 서울 한복판에서 1000년 가까이 된 조각품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탑 근처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멋진 수형으로 서 있어 운치를 더한다. 이 은행나무는 가을에 잎이 노랗게 물들 때면 내가 즐겨 찾는 ‘단골’ 나무 중 하나다. 다시 찾은 봄날에는 따사로운 햇살에 나뭇잎과 잔디가 이미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멀찍이 앉아 나무와 탑이 함께 있는 모습을 스케치북에 담아 본다. 이웃사촌이라고 해야 할까. 원주에 남아 있는 묘비보다 옆에 있는 은행나무가 더 그럴싸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젠가 묘탑과 묘비가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동안에는 묘탑과 은행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사계절 다른 조화로움을 선사해 줄 것이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