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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장희의 스케치 여행]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입력 | 2011-05-21 03:00:00

고려 최고의 불탑이 경복궁에 외로이 서있는 내력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은 경복궁 경내 너른 마당 한가운데 서 있다. 이 탑은 고려시대 석조예술 중의 최고 수준의 걸작으로 꼽힌다. 지광국사탑은 정확히 말하면 묘탑(墓塔)이다.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땅속에 봉안한 후에는 봉분을 올리지 않고 탑을 세운다. 이것이 바로 부도, 즉 묘탑이다. 흔히 탑 앞에 묘비를 세워 생전의 행적을 적어놓는다.

지광국사탑의 현재 위치는 사실 자연스럽지가 않다. 우선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폈던 조선의 법궁(法宮·임금이 사는 궁궐)에 불탑이 있는 것이 이상하다. 또 마땅히 함께 있어야 할 묘비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광국사탑이 궁궐에 자리하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묘탑의 주인인 지광국사 해린(海鱗·984∼1070)은 원주에서 태어났으며 속성(俗姓)은 원씨(元氏), 자(字)는 거룡(巨龍), 아명(兒名)은 수몽(水夢)이다. 그는 유학(儒學)에 능하고 문장과 법문도 출중해 고려 불교 법상종 중흥의 주역이 됐다. 뒤에 국사(國師)에까지 올랐다. 지광(智光)이란 시호는 그가 법천사에서 입적하자 왕(고려 문종)이 내린 것이다.

입적 후 불교의 화장식인 다비(茶毘)가 원주 법천사에서 이뤄졌고, 묘탑과 묘비도 그곳에 세워졌다. 그러나 절은 임진왜란 때 다 타버렸고, 급기야 빈 절터에 남아 있던 탑은 일제강점기 오사카로 밀반출되기에 이른다. 이를 회수해온 조선총독부는 탑을 원래 위치가 아닌 경복궁 경내에 가져다놓았다. 당시 경복궁 안에 박물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6·25전쟁 때는 포화에 탑 윗부분이 처참하게 부서졌다. 지금의 탑은 산산이 부서진 돌 조각을 붙여 보수해 놓은 것이다.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돌 조각을 접착해 놓은 표시를 볼 수 있다. 그 모습이 역사를 견디어 온 아픔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듯하다.

경복궁 안에는 지광국사탑 외에도 여러 개의 불탑이 있었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에 신축되면서 주변 ‘친구’들은 모두 이사를 갔다. 그러나 ‘부상’이 극심했던 지광국사탑은 경복궁 안에 홀로 남겨졌다.

어찌되었건 서울 한복판에서 1000년 가까이 된 조각품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탑 근처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멋진 수형으로 서 있어 운치를 더한다. 이 은행나무는 가을에 잎이 노랗게 물들 때면 내가 즐겨 찾는 ‘단골’ 나무 중 하나다. 다시 찾은 봄날에는 따사로운 햇살에 나뭇잎과 잔디가 이미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멀찍이 앉아 나무와 탑이 함께 있는 모습을 스케치북에 담아 본다. 이웃사촌이라고 해야 할까. 원주에 남아 있는 묘비보다 옆에 있는 은행나무가 더 그럴싸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젠가 묘탑과 묘비가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동안에는 묘탑과 은행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사계절 다른 조화로움을 선사해 줄 것이다.

아무래도 이번 주말에는 묘비를 보러 원주로 스케치 여행을 떠나야 할까 보다. 묘비도 그림에 담고, 묘탑의 안부도 전할 겸. (도움말=원주시청 문화재 담당 이동진 계장)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