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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바로 세우자]과도한 민중사관과 민족주의

입력 | 2011-05-21 03:00:00

과도한 민중민족사관이 현대사학회 탄생 불러왔다




한국현대사학회 창립 학술회의 한국현대사학회가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교대에서 ‘한국의 현대사학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창립기념 학술회의를 갖고 출범했다. 앞줄 왼쪽부터 김용직 성신여대 교수, 안양옥 한국교총 회장, 김학준 KAIST 김보정석좌교수, 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 한흥수 연세대 명예교수, 이철승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 권희영 한국현대사학회 회장(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 차하순 서강대 명예교수,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 송광용 서울교대 총장,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20일 출범한 한국현대사학회는 1980년대 이후 좌편향 민중사관과 편협한 민족사관에 치우쳐온 한국현대사 연구를 객관적이고 세계사적인 시각에 따라 인식 교육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현대사 연구의 혼란은 어떤 요인에 따라 발생하고 발전됐으며 왜 지금껏 고쳐지지 않고 이 사회에 혼돈된 인식을 심어왔을까.

○ ‘해전사’의 그늘 아직도…

국내의 현대사 연구는 1970년대까지 활발하지 못했다. 정치적 억압이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학계가 ‘한 세대가 지나지 않은 사안은 객관성을 담보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본격적인 연구에 나서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정통 역사학계는 지금도 현대사 연구에 소극적이다.

한국현대사 인식 문제의 출발점에는 1979년 첫 권이 나온 ‘해방전후사의 인식’(전 6권)이 있다. 1970, 80년대 현대사 연구는 정치적 억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학회 이름이나 학술잡지에 ‘현대’만 붙어도 억압을 받거나 폐간되던 시절이었다. 현대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1980년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가 ‘계간 현대사’를 창간했지만 창간 당일 전두환 정권에 의해 폐간당했다. 김학준 KAIST 김보정석좌교수는 1973년 ‘한국현대정치론’이라는 이름의 강좌를 만들려다 “다칠 수 있다”는 선배 교수들의 만류로 결국 ‘현대’를 빼고 ‘한국정치론’으로 고쳐야 했다.

이런 황폐한 환경 속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미군정이나 분단, 친일청산. 민족운동 등 예민한 사안을 다뤘다. 한국현대사학회에 참여하는 학자들도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정치적 억압 속에서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던 현대사 연구를 개척한 공로를 인정한다. 그러나 역사를 해석하는 사관(史觀)이 민중과 편협된 민족주의에 경도돼 있었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한다.

실제로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이 시대 ‘운동권’의 기본 교재로 위치를 굳혔다. 여기에 마르크시즘적 유물사관이 맞물리면서 대학가에는 미국을 거부하고 남한 정부보다 북한에 더 큰 정통성을 부여하는 인식이 확산됐다. ‘양키 고 홈’은 모든 집회에서 빠지지 않는 구호였고, 미국과 권위주의적인 정권의 결탁을 음모론적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팽배했다.

○ 수정주의의 영향과 과잉 민족주의

1980년대 민중사관과 편협한 민족주의사관에 영향받은 한국현대사 연구는 북한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과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한국 사회에 퍼뜨렸다. 6·25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로 쳐들어온 북한군(왼쪽). 북한의 남침 저지를 위해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된 맥아더가 1950년 7월 15일 미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유엔기를 넘겨받고 있다. 동아일보DB

1986년 국내에 번역 소개된 미국 수정주의 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도 한국현대사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6·25전쟁이 계급적 갈등에 의한 내전이며 그 발발의 책임이 미국 정부에 있다는 그의 해석은 억압적인 체제하에 있던 한국의 젊은이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한국현대사 자료조차 구하기 힘든 시절, 해박한 계급 갈등 이론으로 포장된 수정주의적 시각은 운동권과 좌파 학자들에 의해 무비판적으로 수용됐다.

수정주의 사관은 운동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마르크스주의적 계급사관에 기초한 분단사관, 통일사관 등을 형성했다. 한국현대사의 △동학혁명 △정부 수립 △6·25전쟁 △근대화 등에 대한 평가 등도 이 사관의 영향을 받았다. 남한 정부의 정통성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오욕의 역사인 것처럼 비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커밍스의 수정주의적 시각은 1990년대 옛 소련 정부의 비밀문서가 해제되면서 설득력을 잃었다. 6·25전쟁의 발발 책임은 스탈린과 북한에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오늘날엔 국내외 좌파 학자들 사이에서도 커밍스의 수정주의 사관이 가진 오류를 지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커밍스 교수도 2006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의 기원’ 1권이 나온 뒤 비밀 해제된 (옛 소련 등의) 문건들을 보니 내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인정한 바 있다.

한국현대사 연구의 왜곡을 불러온 또 다른 한 축으로 ‘감상적이고 과도한 민족주의’도 지적된다. 한국현대사학회 참여 학자들은 사관으로서의 민족주의가 한국에서 감상적으로 흘러 ‘하나의 민족’의 가치만을 강조한 나머지 북한 주민의 인권과 자유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렸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민족주의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이에 못지않은 가치를 가진 단위로서 ‘국가’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현대사학회 “연구성과 대중에 알릴 것”

한국 현대사 연구는 1990년대에 들어 한때 활성화의 기회를 맞았다. 첫 문민정부였던 김영삼 정부가 학계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한국현대사연구소를 설립한 것. 그러나 2년만 존속하고 별다른 이유 없이 김대중 정부 때 없어지고 말았다.

한국현대사학회 참여학자들은 “이후 본격적인 현대사 연구가 없었기 때문에 1980년대에 급격히 팽창한 민중·민족주의 사관의 여파가 아직도 잔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고교 근현대사과목이 독립하던 2002년 좌파계열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대거 교과서로 옮겨진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1980년대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나 ‘한국전쟁의 기원’을 읽고 역사관을 형성한 사람들은 여전히 그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고 “피가 거꾸로 흘렀다”고 말한 바 있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는 2010년 8월 한 라디오 토론회에서 “6·25가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청취자의 질문에 즉답을 피하고 “역사적인 논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취지로 답했다.

권희영 한국현대사학회장은 “지금까지 밝혀진 현대사 연구 성과가 대중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이에 따라 한국현대사학회는 연구 활동과 함께 시민강좌도 운영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 “현대사는 학제간 융합연구 이뤄져야” ▼
한국현대사학회, 다양한 분야 학자들 대거 참여

한국현대사학회에는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분야 학자들도 대거 참여한다. 현대사 분야가 당대사(當代史)를 연구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학제 간 융합연구를 해야 다원적인 역사 복원이 가능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한국현대사학회는 역사학자들이 정치나 외교, 사회학 분야의 연구 성과를 현대사에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면 최근의 현대사 인식 논란이 불거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정치학)가 저서 ‘부국과 건국’에서 거시적이고 비교사적인 시각으로 농지개혁을 연구한 내용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이승만의 농지개혁이 이미 1950년대 초에 70∼80%나 성공적으로 끝난 상태였다. 그래서 6·25전쟁 발발 후 남한을 점령한 북한군이 토지를 재분배했을 때 농민들이 큰 호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라는 연구성과를 내놓았지만 현대사 교과서 등에는 반영되지 못했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국제관계사)는 “한국사 교과서의 근현대사 부문은 사실상 독립운동과 같은 저항의 역사만 기록돼 있지 그 시대의 산업이나 교육 문화 등 오늘날 한국 발전의 밑거름이 됐을 타 분야의 서술이 거의 없다”며 “한국현대사학회가 ‘발전된 한국’과 ‘한국사 책 서술’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연구를 활발히 펼칠 것”이라고 밝혔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왜곡된 한국현대사 인식 비판 저서 낸 전상인 교수
“커밍스 수정주의는 오류투성이… ‘제비가 봄을 만드는’ 논리 빠져”


“여전히 ‘제비가 봄을 만드는’ 논리에 현대사 교육이 사로잡혀 있습니다.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가 오류투성이라는 사실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커밍스에 대한 우상화가 시정되지 않는다는 게 딱합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한국현대사 인식과 교과서 문제에 대해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진)는 “잘못된 역사관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1990년대 비밀 해제된 소련 문서 때문에 그의 학설이 이미 설 자리를 잃었는데도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저서 ‘고개 숙인 수정주의’(전통과현대 펴냄)에서 수정주의 역사관의 모순을 비판한 바 있는 전 교수는 한국현대사 연구에 있어 1980년대는 일단 양적인 르네상스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가 잘못된 인식에 불을 지폈다고 그는 지적했다.

수정주의는 자국 중심의 전통적 역사관을 수정한다는 데서 이름 붙여진 역사관.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6·25전쟁을 계급 갈등에 따른 내전으로 규정하고 전쟁 발발의 책임이 북한과 소련이 아닌 남한과 미국에 있다고 봤다.

전 교수는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출간됐을 당시 그의 수정주의 역사관 앞에서 국내의 학계는 적과 동지로 구분됐다”며 “수정주의 학설에 긍정적 자극을 받은 측과 이에 대한 비판적 대응이 한국현대사 연구의 중심이 됐다”고 말했다. ‘커밍스 콤플렉스’와 ‘커밍스 알레르기’의 대립이었다는 설명이다.

커밍스의 수정주의에선 1905년 을사늑약 이후 1945년까지의 일제강점기를 6·25전쟁의 1차적 원인 제공자로 규정한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지주, 양반계급들은 식민지 국가와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산업자본가로의 전환이 미약했고 이에 반발하는 소작농이 지주, 양반 계급과 갈등하고 대립했다는 논리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성과들은 커밍스의 연구결과를 정면으로 반박한다고 전 교수는 지적했다. 식민지시대 한국 지주들은 일제강점기 후반까지 지배계급의 위치를 지속하지 못했다. 일제가 농업 우선 경제정책을 포기하고 산업화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커밍스 논리의 전제부터가 틀린 셈이다. 전 교수는 “이러한 오류는 커밍스가 6·25전쟁의 내전설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공으로 설정한 픽션”이라고 비판했다. 한반도 분단의 책임에 대한 수정주의의 ‘미국 책임론’에 대해서도 그는 소련이 이미 1945년 9월 하순에서 10월 하순까지 독자적인 북한 분할 통치기구를 구성해 분단을 획책했다며 “커밍스의 시각은 ‘결과를 놓고 과정을 짜 맞추는 식의 연구’였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진 기자 holyj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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