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왕조현 우세, 하지만 더 지켜봐야 할 유역비
모름지기 요괴라면, 내 목숨 앗아갈 요괴라면, 그래 차라리 절세미인이여라~
낡은 창호지 문틈 사이로 뿌연 연기가 피어오른다. 아스라이 다가오는 황홀한 아름다움. 요괴라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지 않은 왕조현(王祖賢)은 그렇게 찾아왔다. 흰 옷자락 펄럭이며, 애잔한 듯 물기 머금은 촉촉한 그 눈빛, 거문고 소리마저 가슴 시리게 만드는 천의 얼굴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남자라면 한 번쯤은 경험해봤을 첫 눈에 반해버린 사랑을 향한 절절한 가슴앓이. 끝내 사랑은 이루지 못했을지언정 그때 그 가슴 떨림은 소녀의 첫 경험처럼 평생 향수로 남는다.
(왼쪽부터) 1987년 \'천녀유혼\'과 2011년 리메이크작 \'천녀유혼\'. 동아일보 DB
우리네 가슴 속의 그 설렘이 바로 '천녀유혼'의 장국영(張國榮)과 왕조현이었다. 이승과 저승으로 나뉘어 있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두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고, 그 뒤로 사람 애간장 녹이는 목소리로 등려군이 부른 '새벽이여 오지 마라(黎明不要來)'가 흘러나온다. 꺄~!
'천녀유혼'(1987)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자주 영화 팬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영화다. 내게도 천녀유혼은 사람들이 하도 "천녀유혼…천녀유혼" 노래를 부르기에 덩달아 TV로 보았다가 그 매력에 정신없이 빠져 허우적거린 영화로 남아 있다.
그 영화 '천녀유혼'이 '대륙의 얼굴' 유역비(劉亦菲)를 내세워 2011년 새롭게 리메이크 됐다.
▶천녀유혼 한판 승부 '1987 왕조현 vs 2011 유역비'
세상의 그 어떤 리메이크 작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바로 원작과의 비교다. 천녀유혼도 예외일 순 없다.
"원작과 모든 것이 똑같다면 리메이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 엽위신 감독의 말처럼 2011 천녀유혼은 시작과 끝이 원작과 다르다.
리메이크한 천녀유혼은 미녀 귀신 섭소천(유역비)과 서생 영채신(여소군)의 애절한 사랑을 중점적으로 다룬 원작과는 달리 퇴마사 연적하(고천락)의 역할이 비중 있게 나온다. 사실상 남자 주인공의 역할은 퇴마사가 가져갔다.
이는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야만 하는 리메이크작의 숙제지만, 동시에 원작의 묘미인 '순수한 두 남녀의 애절한 사랑'을 반감시킨다.
이룰 수 없는 두 남녀의 사랑과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어 가슴 아파하며 영화와 함께 서러운 눈물 흘려야 했던 관객의 감정이입이 전작과 다른 양상을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원작 천녀유혼은 이뤄질 수 없는 영채신(장국영)과 섭소천(왕조현)의 사랑이 관객의 마음을 무너트리고, 욕조신과 키스신은 아찔함의 화룡점정으로 관객의 숨을 멎게 했다.
약하고 어리바리 하지만 사랑 앞에 목숨을 던질 줄 아는 용감한 남자 영채신은 당대 최고의 스타로 급부상하고 있던 장국영의 완벽한 연기로 빛났다. 논란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아리따운 미모의 왕조현은 어색한 화면처리와 특수효과, 단순한 구성으로 자칫 B급 영화로 사라져버렸을지 모를 영화를 수많은 이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홍콩 영화'로 손꼽히게 만들었다.
1987년 장국영(張國榮) 왕조현(王祖賢)이 주연을 맡아 당시 최고의 화제를 낳았던 영화 ‘천녀유혼’이 2011년 유역비(사진)와 고천락·여소군에 의해 리메이크 됐다. 동아일보 DB
▶형만 한 아우 없다
새롭게 만들어진 천녀유혼은 아쉬움과 희망이 공존한다. 이번 리메이크작은 장국영이라는 그림자를 그 누구로도 거둬낼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2011년판 영채신은 그저 약하고 순진한 남자로 전락했다. 퇴마사가 개입된 삼각관계 스토리가 무르익어 갈수록 '내강외유' 영채신의 존재성은 비루해져만 간다.
컴퓨터 그래픽(CG)의 발전은 원작에 비교해 모자랄 데 없지만, 오히려 영화의 맛을 반감시켰다. 또 극중 여우가 나오는 장면의 CG는 이미 할리우드의 CG기술과 접목된 3D와 4D에 익숙한 관객들에 갈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퇴마사의 캐릭터는 전작과 비교하여 출연 시간이 늘어남은 물론 새로운 3인 주인공 체제의 한 축이 되지만 결과적으로 존재감 자체는 감소했다.
이 같은 변화들과 함께 영화 중간마다 웃음을 주는 장면들을 통해 원작에서 벗어나 새로운 천녀유혼을 만들고자 한 엽위신 감독의 고충이 느껴지지만 영화를 접한 관객들의 갈증은 전혀 해소되지 않는 듯하다. 목이 마를 때 아이스크림을 먹은 느낌이랄까.
꿀벌이 새로운 꽃을 발견해 힘찬 날갯짓으로 꽃 위에 앉았지만, 막상 그 꽃은 아름답지만 향기가 없는 조화(造花)여서 허탕을 친 격이다. 그나마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조화만큼은 생화(生花)에 뒤지지 않는 '유역비'라는 것.
여주인공 유역비는 4일 '천녀유혼' 국내 언론시사 및 기자간담회에서 왕조현과 자신 중 누구의 외모가 더 아름답냐는 질문에 “누가 더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서로 다른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섭소천을 연기 할 때도 왕조현의 색이 아닌 나만의 색을 표현하려고 애썼다”고 촬영 소감을 밝혔다. 동아일보 DB
▶제 2의 왕조현, 왜 유역비어야 했나?
왕조현·장국영의 1987년 천녀유혼이 24년 만에 리메이크 됐다. 지금은 우리 곁에 없는 왕조현과 장국영을 대신해 '대륙의 얼굴'이라는 신예 유역비가 등장했다. 재미있게도 유역비는 천녀유혼이 처음 만들어진 그 해에 태어났다.
영화의 제작과 동시에 가장 이슈가 된 것은 바로 '누가 감히 왕조현을 대신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었다.
천녀유혼 속 왕조현은 왕조현 그 자체이자 요괴였으며, 섭소천이었다. 왕조현을 빼고는 요괴도 섭소천도 상상할 수 없는 관객의 마음을 유역비라는 걸출한 외모의 배우가 두드렸다.
유역비는 이미 영화 '포비든 킹덤'과 '신조협려 2006'에서 각각 금연자와 소용녀로 출연했다. 선녀 같은 그녀의 청순한 외모는 남자들의 마음을 인정사정없이 흔들었다. 그는 중국에서 '신선누나'로 통한다.
유역비는 신조협려와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에서도 옷자락 나풀나풀 거리며 미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요괴라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대낮의 꽃밭 키스신도 그이기에 아름다움으로 승화되고, 앵두 같은 입술 사이로 나오는 중국어 또한 전혀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그의 청순함이 돋보일수록 관객들의 마음에는 그를 흠모하는 마음이 늘어만 가고 그가 웃을 때 함께 웃고,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리려고 하는 영채신에 감정이입 되어 어느새 관객 하나하나는 영채신이 돼버린다.
‘섭소천’역을 맡은 유역비는 청순함이 가득 풍기는 긴생머리에 흰색 드레스를 입고 여성미 넘치는 자태를 뽐냈다. 동아일보 DB
이쯤 되면 2011 천녀유혼의 메가폰을 잡은 엽위신이 왜 '신선누나'이자 '대륙의 얼굴'인 유역비를 영화 전면으로 내세웠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유역비의 신비한 매력은 '신조협려'에서 보여준 우유빛깔 청초함을 벗어나지 않았다. 원작의 왕조현은 청순하면서도 색이 흘렀으며 어딘가 애절하고 비극적인 구석이 있었다.
▶'아 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원작의 기억과 부딪히다 마침내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고, 동시에 기억 속 미묘한 감정들이 뒤엉킨다.
그 복잡함을 정리하기도 전에 스크린에는 '고(故) 장국영을 영원히 기억하며'라는 문구와 함께 이젠 더는 들을 수 없는 아련한 장국영의 목소리가 관객의 귀를 적신다. 기자 시사회에 온 몇몇 여기자들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하염없이 흐느꼈다.
"인생길이란 아름다운 꿈은 기나긴 길처럼 멀고…어리석게도 꿈같은 사랑을 찾는 내 마음, 인생길처럼 아득하여라. 인생길 걷는 젊은 청춘 괴로운 가운데 달빛을 감상하네. 이 모진 세상 기쁨은 어느 곳에 있나? 실 날 같은 빛줄기 찾아 길을 떠나네." -장국영 '천녀유혼' OST 中에서-
장국영은 액션으로 승부수를 띄운 다른 홍콩배우들과는 달리 멜로·드라마로 인정받았던 배우로 한국인의 기억에 가장 진하게 남은 외국배우 중 하나다. 우리는 뜻하지 않게 2003년 4월 1일 만우절 그를 보냈고, 그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아니, 처음부터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영채신을 찾는 것 자체가 무의미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원작과 2011년 리메이크 된 천녀유혼을 비교하여 우위를 가리는 것보다는 다시 한 번 지난 향수를 떠올리며 우리의 가슴과 눈을 적셔준 이 영화를 촉매제로 하여 그때 그 시절의 자신들과 조우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비록 리뷰를 위해 '천녀유혼' 원작을 오랜만에 돌려 봤지만, 그들을 다시 만나러 가는 순간 기자는 입이 마르고 손이 떨렸다. 아마도 아련한 기억 속 첫사랑을 마주하는 설렘 때문이었을 것이리라.
동아닷컴 오세훈 기자 ohhoon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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