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꿈 한발 한발… 걸그룹 데뷔 준비 곡홍영 씨‘긴 설명’이 따라다니는 한국소녀… “춤엔 편견이 없기를”
《 사진을 찍으려 하자 얼굴이 붉어졌다. 카메라가 익숙하지 않아서일까. 고개를 숙였다가 살짝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다시 숙였다. 처음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녕하세요.” 서툰 한국말로 인사할 때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면서 찹쌀떡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언니, 떡 좋아하세요? 거금 1만 원을 준 거예요.” 지난밤에 떡을 파는 우즈베키스탄 청년이 불쌍해 보여 샀다고 말했다. 》
기획사의 지하 연습실에서 몸을 푸는 곡홍영 씨. 꼭 가수가 돼서 비슷한 처지의 다문화가 정 청소년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지낸다. 고양=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자신의 한국어 발음이 이상한 점을 의식해서인지 한마디 한마디를 어려워했다. 이런 부끄러움은 몸동작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고개를 자주 숙이고, 깍지를 꼈다 풀었다 했다.
하지만 음악이 시작됐을 때는 달랐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노래 ‘Till The World Ends’가 빠른 템포로 흘러나오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161cm의 아담한 몸이 바운스와 팝핀 등 격렬한 안무를 소화했다. 날카로운 눈빛은 전신거울의 정면을 1초도 떠나지 않았다.
“춤을 추면 가슴이 뛰어요. 숨이 차서 죽을 것 같은데 가슴은 행복하게 뛰어요.” 곡홍영(曲紅英·20) 씨는 14일 오후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정발산동의 지하 연습실에서 1시간의 1차 연습을 마친 뒤 환하게 웃었다. 생머리가 흐트러지고, 얼굴은 땀범벅이었지만 행복한 표정.
휴식시간은 10분. 홍영 씨는 2분이 지나기 전에 벌떡 일어나 거울 앞에 혼자 섰다. 손을 뻗는 동작을 할 때 손가락에 계속 힘이 빠진다고 안무가는 지적했다. 이 말을 입으로 웅얼거리며 동작을 수십 번 반복했다.
홍영 씨는 올해 말 데뷔를 목표로 맹연습 중인 5인조 걸그룹 연습생 중 한 명이다. 오디션 합격 통보를 받고 광주에서 고양으로 올라왔다. 수다를 떨 때는 다른 멤버와 다를 바 없는 한국 소녀처럼 보인다. 하지만 긴 설명이 따라다닌다. 재혼으로 형성된 다문화가정의 자녀, 중도 입국한 다문화가정 청소년.
그는 중국 옌볜(延邊)을 떠나 혼자 한국 땅을 밟았다. 2007년 7월이었다. 중국인 어머니는 한국 남자와 재혼한 뒤 먼저 중국을 떠났다. 비행기에 오르면서 엄마를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설렜지만 한국생활은 마냥 기쁘지 않았다. 아니, 힘들고 괴로웠다.
“혼혈아야, 이민자야, 중국인이야?” 만나는 사람마다 물었다. 그의 어눌한 말투를 들으면 어른과 어린이 모두 같은 질문을 던졌다. 홍영 씨는 엄마를 붙들고 내내 울었다.
친구들과 빨리 친해지고 싶어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교회도 찾아다니며 열심히 말을 걸었다. 하지만 비웃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너 말투 진짜 어리바리하고 웃긴다.” 얘기를 잘 들어주다가도 “왜 반말이야”라며 화를 버럭 내는 어른이 많았다. 존댓말을 잘 모르는 홍영 씨는 익숙한 말이 있는 옌볜이 그리워 울고 또 울었다.
중국을 무시하는 시선도 참기 어려웠다. “중국에는 수박 없지? 이런 거 안 먹어봤지?” 입국 직후, 광주에서 지낼 때 자주 들었던 소리다. 어렵게 사귄 한국 친구는 홍영 씨를 집으로 초대해 놓고는 ‘짝퉁 공화국’ ‘더러운 나라’ ‘게으른 사람들’이라며 중국을 욕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엄마와 배 과수원에 갔을 때는 4만 원을 받았다. 같은 일을 하고도 한국인은 5만 원을 받았다.
홍영 씨는 입국 한 달 뒤, 광주 새날학교에 등록했다. 다문화가정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였다. 거기서 가수의 꿈을 키웠다. 주눅이 들어 있다가도 음악이 나오면 미소가 감돌고, 눈빛이 변했다. 교사들은 이 모습을 눈여겨봤다. 그러고는 학교가 주관하는 외부 공연이나 교회 행사에 대표로 보냈다.
새날학교는 중도 입국 청소년을 위해 8개월∼1년 동안 한국어를 필수로 배우도록 한다. 중도 탈락의 주원인이 한국어를 배우지 않고 정규 교육과정을 밟게 하는 방식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한국어 실력이 늘자 홍영 씨는 가수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김연경 교사(51)는 “홍영이가 일반 학교에 갔다면 언어 문제로 중도 탈락했을 것”이라며 “중도 입국한 아이들은 고등학생이라도 새 나라에서는 갓난아기나 다름없기 때문에 일대일로 한국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노래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실용음악학원에 다니려고 돈을 벌었다. 과일 따기, 상자 포장, 공사장 철근 나르기…. 몸이 힘들었지만 광주와 인근 지역에서 열리는 가요대회는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기획사 오디션에도 10여 차례 응시했다. 더 큰 무대를 꿈꾸며 일과 노래와 춤을 배운 지 3년, 마침내 희소식이 날아왔다. 합격했으니 최대한 빨리 올라오라는. 올해 2월이었다.
고민 끝에 학교를 그만 다니기로 했다. 다행히, 이 학교는 무학년제라서 3년 만에 반드시 졸업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 기회가 되면 나중에 다시 올 수 있다.
어머니 왕춘향 씨(41)는 딸의 꿈을 반대한다. 다문화가정 자녀가 평범하게 살기도 쉽지 않은데 가수로 성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기 때문.
“딸이 중국어 통역 같은 일을 하며 평범하게 살았으면 합니다.” 어머니는 딸이 춤이나 노래 대신 한국어를 더 완벽하게 배우기를 원한다. 한국말에 여전히 서툰 불편함과 이국에서의 고생을 딸은 조금이라도 덜 겪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하지만 홍영 씨는 단호했다. 연락을 받고는 주저하지 않고 짐을 쌌다. 여행 가방 2개를 들고 배낭을 둘러메고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상경 넉 달째, 고양시의 두 평 남짓한 고시원에서 지낸다. “민폐녀로 유명해요. 방음이 안 되는 방에서 노래 연습을 자주 하니까 옆방에서 조용히 하라며 벽을 꽝꽝 치고 난리죠.”
두 달 전에는 고시원 주인과 옆방 할머니의 항의를 못 이겨 다른 고시원으로 옮겼다. 요즘은 화장실에서 연습을 한다. 좋아하는 연습곡, 린의 ‘사랑 다 거짓말’ 중에서 음이 올라가지 않는 부분을 수백 번 반복한다.
열여섯 살, 한국에 들어올 때는 알 수 없는 땅을 밟았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지금은 다르다. 한국말을 잘하고, 한국 친구를 많이 사귀었고 한국 문화에 익숙하다. 그는 또박또박 얘기했다.
“이제 저는 남은 꿈만 이루면 돼요. 무섭거나 그런 건 없어요. 한국에서 당당히 꿈을 이루면 다문화가정의 청소년에 대한 편견을 없앨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더 빨리 큰 무대에 서고 싶어요.”
고양=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