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원 도쿄 특파원
많은 말이 오갔지만 이들의 우려는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원전 사고까지 터져 일본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나라 걱정으로 귀결됐다. 태연하고 침착해 보이는 일본인들도 원전 사고의 파장을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일본 사회의 집단적 위기감과 불안은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때도 대단했다. 중동 이슬람 산유국의 석유 금수조치로 기름값이 하루아침에 배럴당 2달러에서 10달러로 뛰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L당 2000원 하는 휘발유값이 1만 원으로 뛴 셈이다. 당시 석유의존도가 80%에 육박하던 일본은 패닉에 빠졌다. 당시 보도를 살펴보면 화장지와 세제 등 생필품 사재기가 일어났고 ‘광란 물가’라는 신조어가 유행했다. 고도성장 중이던 일본은 이듬해인 1974년 제2차 세계대전 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 수준의 에너지 절약기술도 오히려 오일쇼크가 약이 됐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전력소비량(kWh/달러·2007년 기준)은 0.39로 한국(0.78)의 절반에 불과하다. 공장에서의 노동력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동자의 동선 연구와 불량률을 낮추기 위한 철저한 품질관리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외형보다 실질을 추구하는 세계적 생활용품 브랜드인 무지(MUJI)도 에너지를 아끼려는 일본인의 검소한 소비생활 속에서 탄생했다. ‘다시는 궁핍했던 전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국민적 위기감이 혁신과 브랜드를 낳았다.
오일쇼크 이후 찾아온 전후 최대의 위기를 일본은 또 한번 기회로 반전시킬 수 있을까. 원전 사고 후 일본의 모습은 아직 어수선하다. 20년 장기불황 끝에 찾아온 원전 사고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패배감도 작지 않다.
하지만 일본은 원전 사고와 사상 초유의 전력 부족 사태를 새로운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본 정부와 기업은 소비전력을 실시간으로 파악해 전력 낭비를 없애는 ‘스마트그리드’의 실용화를 서두르고 있다. 전력산업에 정보기술(IT)을 활용한 스마트그리드 기술은 각국 정부가 막대한 재정을 들여 연구하는 차세대 송전(送電)기술이다. 또 에너지 효율성이 뛰어난 발광다이오드(LED) 조명기구 보급과 태양광 같은 신재생에너지 확대 등 에너지산업의 틀을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다.
김창원 도쿄 특파원 chang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