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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명작 속의 명인을 찾아서]미켈란젤로, 다빈치, 라파엘로

입력 | 2011-05-25 03:00:00

르네상스 명작 속엔 예술가의 애증과 내러티브가 있었다




《포도주에 좋은 빈티지가 있는 것처럼 시대에도 빈티지가 있다. 위대한 인물과 사상이 동시에 축복처럼 터져 나오는 시기와 장소가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철학자가 쏟아져 나온 기원전 5세기 아테네, 키케로와 카이사르 등 위대한 통치자와 사상가들이 출현한 기원전 1세기 로마, 브루넬레스코 도나텔로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다빈치 라파엘로 등 천재 예술가들이 활동한 15, 16세기의 피렌체, 마네 모네 세잔 르누아르 등이 후기인상파 시대를 꽃피운 19세기 파리, 쟁쟁한 현대예술가들이 한 시대를 풍미한 20세기 뉴욕 등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류 역사에서 문화 예술의 압도적인 연대로 기억되는 시기와 장소는 15세기 피렌체일 것이다. ‘꽃의 도시’라는 의미인 피렌체는 ‘생각하며 사는 사람의 고향’이자 ‘르네상스의 발상지이자 완성지’로 불린다. 레오나르도 브루니는 1401년 그의 명저 ‘피렌체 찬가’에서 “어느 누구도 이 도시보다 더욱 빛나고 영광스러운 곳을 이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워싱턴포스트지가 선정한 지난 1000년간 그려진 ‘가장 위대한 그림’으로 꼽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 높이 20m의 천장에 그려진 360평 규모의 대작이다. 구약을 모태로 ‘천지창조’ ‘아담과 이브의 탄생’ ‘노아의 홍수’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작품을 의뢰한 율리우스 2세 교황과 수시로 충돌했던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고뇌하는 모습(위)과 교황에게 ‘손가락욕’을 하는 천사의 모습(아래)을 사도들의 그림 속에 은밀하게 그려넣었다. 연세대 김인섭 씨 제공



미켈란젤로의 최대 걸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다비드상. ‘조각의 극치’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높이 5.5m의 대리석을 깎아 만든 걸작이다. 한국그런포스펌프 이강호 회장 제공

○ ‘시대의 반항아’ 미켈란젤로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탁월한 예술가는 단연 미켈란젤로(1475∼1564)다. 조각 회화 건축 등 조형예술 3대 장르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불멸의 작품을 남긴 천재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조각의 극치로 불리는 ‘다비드’와 ‘피에타’상, 인간이 그린 가장 위대한 그림으로 꼽히는 바티칸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와 정면 벽화 ‘최후의 심판’, 그리고 바티칸 대성당의 돔과 메디치 영묘, 산로렌초 성당의 메디치 도서관 등 불멸의 건축물을 만들었다.

그는 여섯 살에 어머니를 잃은 뒤 피렌체 인근의 산골 채석장 마을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냉소적인 농담을 즐긴 그는 “내 조각솜씨는 채석장 유모의 젖을 통해 전수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청소년기에 공방 동료와 주먹다짐을 벌이다 코뼈가 주저앉아 줄곧 ‘못생긴 놈’이란 자괴감에 시달렸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나 동성애자였다.

열다섯 살 때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데메디치에게 발탁돼 2년 동안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의 지적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메디치가의 정적으로 피렌체의 신정정치를 이끌다 화형을 당한 산마르코 수도원의 원장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를 추종하는 등 변신을 하기도 했다. 작품 수주와 예술에 대한 견해차로 23세나 연장자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치열한 갈등을 빚은 것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조각을 잘하기 위해 인체 해부도 불사했던 그의 조각품들은 대리석에 인물을 새긴 것이 아니라 대리석에 갇혀 있던 인물을 정으로 쪼아 불러낸 듯 생동감이 넘쳐난다. 그의 걸작품들 앞에서 관람객은 물론이고 예술가들도 절망 어린 탄성을 쏟아낸다.

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는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9년 전인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령으로 시작됐다. 조각이 회화보다 더 우월한 장르라고 생각해 온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다비드’ 같은 걸작을 남긴 자신에게 천장화 그림을 그리라고 하는 것은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교황의 총애를 받고 있던 라이벌 건축가인 브라만테가 자신을 실패자로 몰고 가기 위해 일을 꾸몄다고 생각했다. 불평과 불만을 거듭하면서도 그는 ‘뭔가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오기로 4년간 성당에 틀어박혀 높이 20m의 천장에 길이 41.2m, 폭 13.2m(1190m²·360평)에 이르는 대작을 완성했다. 교황은 신약을 토대로 한 작품을 기대했으나 그는 구약을 소재로 했다. 천지창조에서부터 아담과 이브의 탄생과 에덴동산 추방, 노아의 홍수와 타락을 주제로 한 장면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불멸의 걸작이다. 등장인물만 300명이 넘는다.

르네상스 3대 천재 중 한 사람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표작 ‘모나리자’.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작품과 아이디어를 완성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연세대 김상근 교수 제공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서니 여기저기서 “쉬” “노 포토”를 외치는 소리가 가득 퍼진다.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지만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은 감시 직원의 눈길을 피해 카메라 셔터를 끊임없이 눌러댄다. 미국의 권위지 워싱턴포스트는 2000년대 진입을 앞둔 1995년 마지막 날 신문에 전 분야에 걸쳐 ‘지난 1000년간 최고(Millenium Best)와 최악’들을 선정해 발표하면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가장 위대한 그림’으로 꼽았다.

다혈질인 미켈란젤로는 선지자 스가랴의 얼굴에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얼굴을 그려 넣었고 뒤에 서 있는 천사들 가운데 하나가 그를 향해 ‘손가락욕’을 해대는 장면을 슬그머니 그려 넣었다. 자신은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모습으로 담아냈다. 그는 자신의 그림과 조각작품 곳곳에 미워하거나 존경하는 인물들을 교묘하게 그려 넣어 애증을 담아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1982년, 일본 NHK가 최첨단 기법을 동원한 9년여간의 복원작업으로 그림을 덮고 있던 때와 후대에 이루어진 덧칠을 제거해 본래의 색채와 형태가 되살아났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서 전해진 한지 제조 기술로 만들어진 화지가 때를 빨아내는 기능을 톡톡히 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스티나 성당 제단 앞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최후의 심판’은 미켈란젤로가 1541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심판을 당하는 인간 군상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압권이다. 이 거대한 작품에도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모습을 은근슬쩍 그려 넣었다. 작품 중앙 부분에 한 선지자가 사람의 살가죽을 벗겨 들고 있는데 바로 그 참혹한 인물이 미켈란젤로 자신의 모습이다. ‘최후의 심판’이 완성되었을 때, 작품을 주문했던 교황 바오로 3세는 벽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최후의 심판, 그 순간에,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로마에서 임종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로 옮겨져 부친과 함께 산타크로체 성당에 잠들었다. 미켈란젤로를 낳고, 기르고, 묻어 준 피렌체에서 그의 영묘를 참배하면서 이 위대한 예술가를 한없이 그리워했다. 그의 ‘예술적 성취’는 물론이고 ‘인간적 흠결’조차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재해석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상대적으로 ‘가장 르네상스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미술 과학 수학 음악을 종횡으로 넘나드는 천재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자 관람객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그림이다. 그가 그린 ‘최후의 만찬’ 또한 교회를 포함해 전 세계에 가장 많이 걸려 있는 그림 가운데 하나다. 소설 ‘다빈치 코드’와 영화 등으로 만들어져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르네상스 연구 전문가인 연세대 김상근 교수(47·신학)는 “다빈치는 제대로 된 완성 예술품을 내놓지 못했으며 그가 설계한 발명품들은 아이디어는 주었는지 모르지만 실제로 설계도에 따라 만들었을 때 제대로 작동한 적이 없다”고 했다. ‘모나리자’에 눈썹이 없는 것도 미완성작이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다빈치가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프랑스 정부와 루브르 박물관의 마케팅 전략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라고까지 말했다.

라파엘로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테네학당’. 중심부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각각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그려넣은 것을 비롯해 소크라테스, 알렉산더 대왕, 피타고라스, 유클리드, 조로아스터 등 54명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연세대 김상근 교수 제공

○ ‘교황청의 궁정화가’ 라파엘로

고상하고 우아한 그림의 대명사인 라파엘로(1483∼1520)는 피렌체 태생은 아니다. 스승을 무시했던 미켈란젤로와는 달리 스승 페루지노의 착하고 충실한 제자였으며 그의 화풍을 충실하게 따랐다. 그는 천재들의 도시인 피렌체에서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대신 가톨릭교회의 ‘영원한 도시’인 로마에서 교황의 총애를 받았다. 한마디로 ‘교황청의 궁정화가’였던 것이다. 영화 ‘아마데우스’로 치면 모차르트보다는 살리에르에 더 가깝다. 1511년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일부를 공개하자 라파엘로는 큰 충격과 좌절에 빠졌다. 교황의 숙소인 서명실에 ‘아테나학당’ 등을 그리고 있던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얼굴에 미켈란젤로의 모습을 그려 넣어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흐른다’는 말로 세상의 이치를 설명했던 헤라클레이토스의 얼굴에 젊은 시절 미켈란젤로의 모습을 그려 넣어 그가 외톨이 신세인 것을 조롱하기도 했다. 자신의 모습은 오른쪽 아래 오른쪽에서 두 번째 구경꾼들을 빤히 쳐다보는 미소년으로 담아냈다. 모두 54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라파엘로는 1504년부터 1508년까지 피렌체에 체류하면서 ‘방울새의 성모’ ‘도니부부의 초상화’ ‘대공의 성모’ 등을 남겼다. 로마에서 남긴 작품 중에서 ‘율리우스 2세의 초상화’ ‘레오 10세와 추기경들’ ‘의자의 성모’ 등이 피렌체의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서른일곱 살에 로마에서 요절한 그는 인류가 남긴 위대한 건축물인 로마 판테온 신전에서 조용히 안식하고 있다.

로마·피렌체=오명철 문화전문기자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