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는 미래-위기닥칠 미래, 두 가지 미래를 준비하라”
인터뷰하고 있는 짐 데이토 교수. 버섯 모양 헤어스타일, 인디언을 닮은 듯한 외모의 데이토 교수는 “나 한사람이라도 석유를 아끼자”는 생각에 수십 년째 낡은 모터사이클로 출퇴근하고 있다. 팔순이 가까워오는 나이에도 청바지에 로봇 그림이 그려져 있는 티셔츠를 즐겨 입는 모습에서 ‘미래’라는 ‘알지 못하는 세계’를 공부하는 학자다운 독특함이 느껴졌다. 호놀룰루=하와이주립대 신범철 연구원 촬영
27일 오전 강의를 마친 점심시간, 그를 만났다. 그는 밖에서 한국을 보는 외국인 학자답게 “한국의 미래를 생각할 때 가장 큰 변수는 북한”이라고 했다. 마침 지난주 한국의 최대 이슈는 ‘김정일 방중’이었다. 데이토 교수는 고 황장엽 씨 초청으로 1989년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나를 초청했던 사람들 중에는 ‘김정일 승계는 말도 안 된다. 불가능할 것’이라고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결국 승계는 이뤄졌고 그때 만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숙청됐거나 탈북했다. 앞으로 김정일 사망 이후 북한이 불안정하게 될 것이지만 나는 남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기다려라. 아무것도 하지 마라’.”
“‘적대적인 관계’를 만드는 일을 하지 말라는 거다. 어차피 시간은 남한 편이니까 통일이 될 때까지 참을성을 갖고 체육이나 문화 교류를 통해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천안함 사건이 터졌을 때 반격하지 않은 것은 잘했다고 본다.”
―향후 북한 사람들까지 먹여 살리려면 남한은 경제도 더 키워야 하고 할 일이 많다.
“미래는 여러 가지다(그는 ‘future’ 대신 ‘futures’라는 복수를 썼다. 이게 그의 미래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하나의 미래만 생각하지 말라. (여기서 내가 말하는) 미래를 30년 뒤로 한정한다면 (남북관계는) 지금처럼 적대관계가 지속될 수도 있고 ‘1국 2체제’가 될 수도 있다. 아예 아시아가 유럽연합처럼 국가연합이 될 가능성도 있다. ‘성장하는 미래’도 준비해야 하지만 석유 고갈과 식량 위기에 대비도 해야 한다. 어떤 미래가 되느냐에 따라 남한은 오히려 북한으로부터 ‘최악의 상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노하우’를 얻어야 할지 모른다.(웃음)”
―그렇게 여러 미래를 나열하기만 하면 ‘미래학’의 역할은 뭔가.
―자살하지 말고?(웃음)
“(따라 웃으며) 예스. 당신이 생각하는 몇 가지 미래 외에 미래학자가 나열하는 또 다른 다양한 미래를 듣다 보면 희망이 생길 것이다.”
―1933년생이다. 지난 삶과 비교했을 때 지금의 세계는 더 불안한가.
“그렇지 않다. 내가 태어났을 때 미국은 대공황 한가운데에 있었다. 나만 해도 생후 3개월 때 부친이 사망했다. 모친은 생계를 위해 친정으로 갔는데 내가 어릴 적 외조부 외삼촌이 다 죽었다. 나는 외할머니 엄마 이모 등 온통 여자에게 둘러싸여 자랐다. 가난했다. 삶이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 정말 좋아졌다. 삶이 갈수록 좋아졌으니 행운아인 셈이다.”
“(고개를 저으며) 미국의 경우 9·11테러 전까지 20년간 거의 아무 일도 없었다. 그때 태어난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어려움 없이 자랐다고 말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계속 삶이 나빠지고 있다. 경제위기로 취업도 못하고 결혼도 못한다. 나 역시 아직 직업을 갖지 못한 막내아들(25)과 같이 산다.”
―그런 세대에게 조언을 한다면….
“두 가지 미래를 준비하라는 거다. 성장하는 미래에 대비해 상상력을 세계화하라는 것과 위기가 닥칠 미래에 대비해 ‘자족하라는 것’이다. 자족에는 만족하라는 것도 있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에너지와 식량위기, 석유 고갈에 대비해 먹을 것을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아들 여자친구가 농장을 갖고 있는데 나는 아들에게 ‘가서 농사를 배우라’라고 말한다.”
―일본어도 능통하고 6년간 교수(릿쿄대)로도 있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의 미래는….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국가적인 비전을 세워 전진했지만 버블이 무너지면서 길을 잃었다. 이번 재난이 걱정스러운 것은 비교적 준비를 잘해왔다고 생각했던 부분(지진 대비)에서 실패를 했기 때문에 충격이 더 클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런 코리아(Learn Korea·한국을 배워라).”
―어떤 점을 배우라는 건가.
“모든 면이다(수차례 방한 경험이 있는 그는 2004년 한국인 제자와 함께 ‘한류’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한국에 친숙하다). 지난 50년 동안 보여준 한국의 성취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도 기로에 서 있다. 이제 선진국을 모방해 발전하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삼성전자만 해도 이제는 모든 것을 혼자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한국에 필요한 조언은….
“막내아들에게 한 이야기랑 같다. 성장하는 미래, 위기가 닥칠 미래 둘 다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재난이 많아졌다.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없다. 나는 1970년대부터 환경 변화를 눈여겨봐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믿으려 하지 않았다. 8월 하와이에서는 ‘해수면 상승에 적응하기’ 회의가 열린다. 이제는 ‘왜’를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맞춰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심지어 (환경 변화를) 환영하는 자세까지 필요하다.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항상 ‘문제 덩어리’라는 것을 우선 받아들이고 그것에 적응하고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미래학’은 ‘문제투성이’인 현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냐를 가르치는 ‘현재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이야기와 상상’이 지배하는 ‘드림 소사이어티’를 예견하면서 예술가 배우 스포츠스타가 뜰 것이라고 했다. 그런 사회는 이미 현실이 되었다. 늘 앞을 고민하는 미래학자로서 죽음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은 어떤 생각을 주나.
“어떤 미래학자들은 영생을 꿈꾸지만 나는 87세까지만 살고 싶다.”
―87세?
“신체가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나이인 것 같다.”
―지금도 무척 건강하고 즐거워 보인다. 비결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앨빈 토플러와 함께 미래학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토플러가 먼저다. 나는 그의 책 ‘미래의 충격’이 나오고 난 뒤 시작했다. 토플러와 나는 출발과 목적이 달랐다. 토플러는 대중적인 책을 내고 컨설팅을 하는 쪽이었지만 나는 교육자로서의 삶이 더 맞다고 생각했다. 토플러보다 덜 유명할지는 몰라도(웃음) 지난 30년 동안 나를 거친 제자들이 전 세계에서 미래학을 가르치고 있다. 나는 씨앗이었다. 대단히 만족한다.”
강의와 인터뷰 내내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통섭’의 경지를 보여준 이 노학자는 요즘도 매일 오전 5시부터 각종 자료와 뉴스를 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한국인 제자 박성원 연구원(박사과정)은 “따뜻하면서도 엄격한 가르침, 겸손하고 소박한 언행에서 진정한 스승을 만났다는 깊은 신뢰를 느낀다”고 했다.
데이토 교수는 인터뷰 말미에 “나의 미래는 사라질지라도 공동체의 미래는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미래를 낙관한다”고 했다. 피부색과 국경을 넘어 경험과 지혜가 많은 한 나이 많은 현자(賢者)가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갖게 된 삶에 대한 연민, 애정, 확신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현대사회가 불안으로 가득하다고 하지만 불안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미래를 상상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기대로 바뀔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데이토 미래학’의 핵심 같았다.
호놀룰루(하와이)=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 짐 데이토 교수는 ::
―1954년 미국 플로리다 스테츤대 졸업 (고대·중세철학 전공)
―1955년 펜실베이니아대 대학원 졸업 (정치학 석사)
―1959년 아메리카대 정치학 박사
―1960∼66년 일본 도쿄 릿쿄대 교수
―1967년 버지니아공대 교수
―1969년 하와이대 교수(∼현재)
―1972년 하와이 미래학연구소 소장(∼현재)
―1977년 앨빈 토플러와 미래연구소(IAF) 설립
―1883∼93년 세계미래학연맹 사무총장, 의장
―1993년 프랑스 국제우주대학(ISU) 교수(∼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