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솟는 유가… 집잃은 주민…“북쪽놈들이 50년간 다 뺏어 가”
26일 만난 택시 운전사 아이작 테웰데 씨(28)는 출고된 지 20년이 넘은 일본제 승합차로 영업을 한다. 전날 밤 내린 비로 진흙탕이 된 시내 곳곳을 이른 아침부터 돌아다녔다고 했다. 기름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주유소 몇 곳에 들렀지만 모두 ‘No Diesel’(경유 없음)이라는 쪽지만 보였다. 그는 5번째 들른 주바 외곽의 주유소에서 겨우 연료를 채울 수 있었다.
○ 불안한 평화, 불안한 삶
수단은 석유 60억 배럴이 묻혀 있는 산유국이다. 유전지대는 대부분 남수단에 있다. 하지만 모든 정유공장은 수단공화국(북수단)에 있어서 북쪽의 공급 라인이 막히면 남쪽의 우간다나 케냐에서 들어오는 석유에 의존해야 한다. 북수단군이 20일에 국경지대를 무력점거한 뒤 석유 공급이 끊기자 주바의 석유 가격이 계속 치솟았다. 같은 시기 북수단 수도 하르툼의 경유 가격은 L당 1.4파운드(약 560원) 정도였다. 테웰데 씨는 “석유는 남수단에 있는데 이렇게 비싼 가격에 사야 하다니 말도 안 된다. 이게 바로 남수단이 독립하려는 이유다”라고 말했다.
남수단 물가는 끊임없이 요동친다. 공산품을 만드는 모든 공장이 북수단에 있기 때문이다. 내전 상황에 따라 공급이 늘 불안정해서 병에 담긴 식수도 가격이 3배까지 뛰는 일이 흔하다. 면화는 남수단에서 생산하지만 남수단에 의류 공장은 단 한 곳도 없다. 북수단에서는 20파운드 이하로 살 수 있는 티셔츠를 주바에서 사려면 35파운드는 줘야 한다.
거리에서 잡화를 파는 로테리오 씨(57)는 남수단 군대인 수단인민해방군(SPLA) 소속으로 20여 년을 싸웠다. 왼팔을 다쳐 팔이 굽혀지지 않는다. 독립에 대해 묻자 그는 “북쪽 아랍계 놈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50년 동안 우리는 같은 나라가 아니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익숙한 전쟁… 탱크도 놀이터 남북 내전 때 버려진 탱크 주변에서 즐겁게 노는 남수단의 일곱 살 어린이들. 모든 마을에 군인이 주둔하는 남수단에서 전쟁의 흔적은 아이들에게 익숙한 놀이터가 된다. 주바에서 150km 떨어진 작은 마을의 풍경. 주바=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루시 씨에게는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남편이 있지만 월급은 한 달에 300파운드에 불과하다. “독립 투표를 했다고 했는데, 앞으로 생활이 더 나아질 것 같으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가난이 갑자기 나아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돌을 팔던 여성들은 오후 6시가 넘어가자 길 건너편 학교로 향했다. 이들은 몇 달 전부터 이곳에서 지낸다. 독립을 앞두고 정부가 새 도로를 내면서 이들이 살던 집을 밀어버린 뒤부터였다. 움막 같은 집이지만 터전을 잃어버린 이들은 보상을 받지도 못한 채 학교 교실에서 살라는 지시를 받았다. 낮에는 길가에서 돌 조각을 팔다가 저녁에는 교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잔다. 학생들이 등교하는 오전 8시 전에는 다시 아이들을 챙겨 거리로 나오는 것이 이들의 일과다.
○ 내전 이후 남겨진 상처
남수단 정부는 내전으로 250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추정한다. 2005년에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무력 분쟁은 이어지고 있다. 언제까지,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을지 아무도 모른다.
▼ 英식민통치 후 반세기 내전… 99%가 분리 지지 ▼
남수단공화국 탄생까지
남수단인들이 여기에 반발하면서 1955∼1972년에 내전이 벌어졌다. 평화협정이 체결됐지만 북수단 정부가 다시 이슬람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1983년 2차 내전이 이어졌다. 남수단 반군 세력인 수단인민해방운동(SPLM)은 수단인민해방군(SPLA)을 조직해 저항했다. 두 차례의 내전으로 남수단에서 25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북수단 정부와 남수단 SPLM이 2005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내전은 막을 내렸다. 6년 뒤인 2011년에 남수단의 국민 투표로 분리 독립 여부를 결정하자는 내용이었다. 올해 1월 실시된 투표에서 남수단인 99%가 분리 독립을 지지해 7월 9일 새 국가 ‘남수단공화국’이 탄생하게 됐다.
■ 벤자민 남수단 공보장관 “남수단 탄생은 분리 아닌 독립”
주바에서 만난 바르나바 마리알 벤자민 남수단 정부 공보장관 겸 대변인(사진)은 ‘독립’을 여러 번 강조했다. 수단에서 남수단이 분리되는 과정이 과거 영국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과정과 마찬가지라는 얘기였다.
―독립을 이루기까지 많은 피를 흘렸는데….
“50여 년간(1955∼2005년)의 내전에서 남수단인 250만 명 이상이 죽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우리는 수단 북부 아랍계의 노예였다. 독립 준비는 잘되고 있다. 7월 9일에는 많은 세계 정상이 새 국가의 탄생을 축하하러 올 것이다. 국경 문제가 남아 있지만 이 아이(남수단)는 태어나야 한다. 제때 태어나지 못하면 어머니 배 속에서 죽게 되지 않겠는가.”
―분리 이후 북수단은 적인가 동지인가.
“남한과 북한 같은 관계는 바라지 않는다. 서로가 좋은 시장이 될 수 있고 석유에 관한 기반시설을 공유할 수 있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하지만 북수단은 먼저 다르푸르 학살을 비롯해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국경지대 아비에이를 침략해 시민을 죽이고 집을 불태우는 일은 그들이 할 일이 아니다.”
―자원이 많지만 생활수준은 낮다.
“남수단은 축복받은 땅이다. 석유 금 니켈 철 구리 다이아몬드 등 풍부한 지하자원을 갖고 있다. 광활하고 비옥한 토지는 지구 최대의 유기농 농장이다. 또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케냐의 마사이마라 국립공원보다 더 많은 다양한 동물이 있어 관광사업도 가능하다.”
―한국과 어떤 관계를 원하는가.
“기반시설이 전쟁 중에 철저히 파괴됐다. 도로 다리 집 학교 병원 등 모든 시설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우리는 친밀한 해외 국가와 단체의 개발을 장려할 것이다. 한국 정부가 관심을 갖는다면 크게 환영하겠다. 폐허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룬 한국의 경험과 기술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주바=남윤서 기자 baron@donga.com